숙종대왕 - 시대상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시대상

 숙종 재위년간은 현종에 이어 소빙기적 기후가 특징으로 한발과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당쟁 또한 치열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어 많은 사림 정객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경신년 · 기사년 · 갑술년에 정권이 바뀌는 당쟁의 치열함이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과제에 직면한 숙종은 재위 46년간을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효종조 이 후 왕실의 왕자 생 산이 단지 왕자 한 사람으로 그쳐 종친세가 취약하게 된 점도 이 시기에 주목된다.

 가. 유림에 대한 배려와 문묘배향

 숙종은 정치적 난제를 유자(儒者) 정치인과 함께 극복하는 처지를 잘 알고 있어 사림들의 학문과 유학의 위상을 정치적으로 높게 인식하면서 사림의 협력을 구하고 있었다. 즉 왕은 강연(講筵)에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는 등 송대 유학자들을 예우함은 바로 조선 성리학을 전수하는 사림의 예우와 연계되는 것이다. 또 문묘(文廟)에 송(宋)의 주 염계(周濂溪) · 장횡거(張橫渠) · 이정(二程) · 소강절(邵康節) · 주자(朱子) 등 육현(六賢)을 정전(正殿)으로 올렸으며, 양무(兩?)의 한(漢)나라 순황(荀況) 이하 열 사람을 내치고 송(宋)의 양시(楊時) · 나종언(羅從彦) · 이동(李쪋) · 황간(黃?) 및 우리 나라의 이이(李珥) · 성혼(成渾) · 김장생(金長生)을 배향(配享)할 것을 명하였다. 어필(御筆)로 친히 송시열(宋時烈)의 화양서원(華陽書院)과 송준길(宋浚吉)의 흥암서원(興巖書院)의 편액(扁額)을 쓰니, 현덕(賢德)이 있는 이를 숭상하여 선비의 추향(趨向)을 통일하기 위함이었다.

 숙종은 일찍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여러 유생(儒生)들을 모아 놓고 학업(學業)을 면유(勉諭)하였으며, 명조(明朝)의 제도를 따라서 별도로 계성묘(啓聖廟)를 세웠다. 또 하번(何蕃) · 진동(陳東) · 구양철(歐陽澈)의 사우(祠宇)를 세워 사기(士氣)를 격려할 것을 명하였다.
숙종대왕 - 시대상 (2)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또한 선조(先朝)의 빈사(賓師) · 노신(老臣)에 대하여 공경과 예의를 다하였고, 현사(賢士)를 예(禮)로 대우하여 산림(山林)에서 정승에 임명된 이가 또한 몇 사람이었다. 또 문사(文士)를 삼선(三選)하고 호당(湖堂)에 사가(賜暇)하여 문풍(文風)을 권면하였다. 이같은 주자학을 연구하는 유림과 조정에서 왕을 도와 민생안정과 조정의 정책입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림에 대한 왕실의 배려는 숙종조 내내 지속되고 있었다.

 유학의 사회윤리를 보급하여 사회기강을 세우려는 조선왕실의 정책기조를 계승한 왕으로 여러 조처를 취하게 된다. 예컨데 대사성(大司成)으로 하여금 이이(李珥)가 지은 <학교모범(學校模範)>을 가져다가 참작해 강정(講定)하고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 때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군상(君上)은 높은 자리에 계시니, 어찌 능히 민간 일의 고생과 어려움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숙(李?)의 집에 옛 화병(畵屛)이 하나 있는데, 우리 나라 민간(民間)의 사시(四時) 농공(農功)을 자못 상세히 그렸습니다. 마땅히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모화(摹畵)해 들여오도록 하여 예람(睿覽)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빈풍(?風)의 화병을 만들어서 보았는데, 이제 듣건대, 이 병풍은 우리 나라의 농공을 그렸다고 하니 더욱 보고 살필 만한 것이다. 대내(大內)로 들이도록 하여 본 뒤에 이모(移摹)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679년 숙종은 유교(儒敎)가 폐이(廢弛)되었다며 경상(慶尙) · 전라(全羅) 양도(兩道)에 4명의 계수관(界首官)과 제독관(提督官)을 다시 설치했고,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관무재(觀武材)를 하고 겸하여 문신(文臣)의 정시(庭試)를 행하였다든가 어사(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내어 약간인(若干人)을 시험하여 뽑았다는 것은 사림세력을 무마하여 왕정에 협력 을 얻고자한 왕의 정치적 행위라고 하겠다.

 숙종은 유교문화의 이념을 정리하면서 기자에 대한 존숭을 표현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즉
“내가 이제 홍범(洪範)의 글을 강(講)하는데,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도(道)를 전하여 이륜(彛倫)을 펴게 했고, 동방(東方)에 봉해지자 크게 교화(敎化)를 밝혀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연하여 기술할 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동국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관대(冠帶)를 하고 능히 오상(五常)을 밝혀 소중화(小中華)의 칭호를 얻도록 한 것 은 기자의 힘이다. 문장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각별히 제문(祭文)을 짓도록 하고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기자묘(箕子廟)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 · 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 · 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먼저 기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러한 기자 존숭의 명분은 중국유교문화에 기원한다는 조선정치이념의 기초를 강조한 것이다.
숙종대왕 - 시대상 (3)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상징적 예제의 내용이 문묘로 표현되는 것인데 숙종은 1680년(숙종 6) 문묘(文廟)의 사전(祀典)을 수정(修正)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종향(從享)된 분 가운데 수장후(壽長侯) 공백요(公伯寮) ·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 기양백(陽伯) 가규(賈逵) · 부풍백(쨓風伯) 마융(馬融) · 사공(司空) 왕숙(王肅) · 사도(司徒) 두예(杜預) ·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 임천백(臨川伯) 오증(吳澄)을 출향(黜享)하고, 문등후(文登侯) 신장(申컧) ·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중에서 첩향(疊享)으로 인해서 신당을 빼버렸으며, 건령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 · 화양백(華陽伯) 장식(張쳫) · 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 · 숭안백(崇委伯) 채침(蔡沈)은 서열(序列)이 잘못되었다 하여 위치(位置)를 개정하였고, 송조(宋朝)의 장락백(將樂伯) 양시(楊時) · 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 · 문정공(文靖公) 이동(李쪋) · 문숙공(文肅公) 황간(黃?)과 본조(本朝)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새로 성무(聖?)에 배향하였다. 이이와 성혼을 종사(從祀)해야 된다는 주청(奏請)은 인조 1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종 9년 무렵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유생들이 다시 “송조(宋朝)의 3현(三賢)을 함께 배향해야 된다.”는 의논을 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보(章甫)가 누차 호소하니,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을 내려 다 함께 승배(陞配)하게 하였다. 또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으로 인해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게 하여 한결같이 명(明)나라 제도에 의해 산출(刪黜)하고 개정하도록 했다. 문묘에 종향되는 유신은 유학진흥과 함께 유교정치면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보였던 유학자이면서 정치인이 선정되는 것이다. 중국 유학자의 경우 조선의 학풍과 정치적 성향을 연계하여 출묘와 입묘가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 정치인이자 유림의 대표격인 문묘종사의 유학자는 왕실에 의하여 일정한 정치적배려가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1687년(숙종 13)에는 대신(大臣)의 청에 따라 성묘(聖廟)에 종향(從享)한 여러 현인들의 자손을 모두 녹용(錄用)하고 그 벼슬을 대대로 물려받게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한 것도 사림과의 원만한 정치수행을 위한 조치라 하겠다.
 사유(師儒)의 말에 따라 연산(連山) · 남포(藍浦) 두 고을의 세미(稅米)로서 전란을 겪은 뒤 호조에 귀속시켰던 것을 다시 양현고(養賢庫)에 보냈다.
 서도(西道)에 별과(別科)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등한하였던 서북인사 유자들에게 입사의 기회를 넓히는 작업이 왕에 의하여 추진됨을 의미한다.

 유림에 대한 배려는 바로 왕의 인사정책으로 반영된다고 하겠다.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면서 말하기를,
“국가의 치란(治亂)은 훌륭한 인재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고, 등용하고 퇴진시키는 권한은 전조(銓曹 : 吏曹와 兵曹)에 있다. 세상이 잘 다스려져 태평 무사할 때의 늘 하는 주의(注擬)일지라도 오히려 면려(勉勵)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지금처럼 나라일에 어려움이 많아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 정의(情意)를 유통시키는 때이겠는 가? 반드시 자기의 사의(私意)를 떨쳐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절의(節義)를 포장하고 덕행(德行)을 숭상하며, 청렴한 관리를 등용하고 벼슬길이 막힌 사람을 틔워 줄 것을 생각하고 용동(聳動)시키고 진작(振作)시키는 방도로 삼도록 하라. 관안(官案)을 살펴보고 결원이 있는 대로 의망(擬望)하여 들이고 의망한 대로 점하(點下)한다면, 한 사람의 정관(政官)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찌 친히 대정(大政)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숙종대왕 - 시대상 (4)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1690년(숙종 16)에는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이어서 선비를 시험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회유(誨諭)하기를,
“상서(庠序)와 학교(學校)를 만들어 사방(四方)의 선비를 양성하는 까닭은 대개 바른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선(善)을 택해서 자신을 닦으며, 인륜(人倫)에 근본을 두고 물리(物理)에 밝게 하고자 함이니, 어찌 단지 글이나 짓고 녹(祿)이나 구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옛날 전손(컉孫)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참으로 능히 학문이 넓고 선택이 정밀하며 조수(操守)가 간요(簡要)하다면 벼슬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찾아올 것이다. 가만히 살펴 보건대, 근래에 선비들의 습속이 옛날같지 않아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단정하여 정치의 방법에 밝게 통달한 사람은 적고, 문사(文詞)를 숭상하고 녹리(祿利)를 추구하는 자들만 넘실대니, 이것이 어찌 조종(祖宗)의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신 본뜻이겠는가? 옛적에 안정(安定) 호공(胡公)이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의 교수(敎授)가 되었을 적에 부지런히 바르게 계칙(戒勅)하니,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들과 판이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훌륭한 여러 선비들이 지척에 있고 위와 아래의 정(情)과 뜻이 막힘없이 통하니, 유액(誘掖)하고 격려하는 바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의 훈계를 공경히 들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잃지 말라.” 하였다.

 숙종은 관원을 보내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능(陵)에 제사지내는 기회를 통해 지방유림에게도 구체적인 관심을 보이게 된다.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徐敬德)의 서원(書院)에도 모두 제사지낼 것을 명하고, 만월대(滿月臺)에 친림(親臨)하여 문과와 무과를 베풀고, 겸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부로(父老)들을 효유(曉諭)하라고 명하고, 미처 봉입(捧入)하지 못한 환상(還上)과 각 아문(衙門)에서 칙수(勅需)로 빚낸 것들을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선혜청(宣惠廳)의 쌀 1천 석을 내어 지나온 각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숙종은 말하기를,
“고도(故都)에 친림(親臨)한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것이다. 이에 어제시(御製詩) 세 수를 내리니, 세종조(世宗祖)의 고사(故事)에 의해 입시(入侍)한 우 상(右相)으로 하여금 기문(記文)을 짓게 하되, 전말(顚末)을 갖추어 싣고 판(板)에 새겨서 개 성 남문(南門)의 문루(門樓)에 걸게 하라.”
하였다. 또 김포 통진에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축조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후 1689년(숙종 15) 출향되었던 서인계의 유학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복향(復享)하도록 하였다. 문묘 배향은 유학과 정치력이 합일된 왕실의 배려라 하겠다. 경기(京畿)의 유생(儒生)들이 두 현신(賢臣)을 복향할 것을 상소로 청하였으므로, 그 일을 예조(禮曹)에 내리니,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였다. 숙종은
“두 현신의 도학(道學)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나, 처음에 정인(正人)을 해치는 무리들에게 속고 가려져 출향(黜享)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항상 뉘우치고 한스럽게 여겨 왔다.”
하고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임경업(林慶業)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명하고, 제사를 내렸다. 1698년(숙종 24)에는 친히 문회서원 (文會書院 : 황해도 배천에 있는 서원으로 이이 · 성혼 · 조헌 · 박세채를 봉헌하고 있다)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려 주었다.
숙종대왕 - 시대상 (5)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1705년(숙종 31)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문과 · 무과를 실시해 인재를 뽑고, 하교(下敎)하기를,
“기자(箕子)가 동방(東方)에 봉(封)해지자 8조(八條)의 가르침을 펼쳐 남겨진 교화가 수천 년 이래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근시(近侍)를 보내 그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였지만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고, 별도로 수호(守護)를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조(宋朝)의 주염계(周濂溪) · 장횡거(張橫渠) · 정명도(程明道) · 정이천(程伊川) · 소강절(邵康節) · 주회암(朱晦庵) 등 여섯 현인(賢人)을 성전(聖殿)에 승배(陞配)하고, 반교(頒敎)하였다.

 관원을 보내 송시열(宋時烈) · 이귀(李貴) · 김집(金集) · 홍익한(洪翼漢) · 윤집(尹集)의 묘소(墓所)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윤집의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진휼청(賑恤廳)의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재차 떠돌이 걸인들을 갯가에 모아 마른 양식 을 나누어 주게 하고, 환궁한 뒤 도신(道臣)에게 차원(差員)을 정해서 거처를 잃은 걸인에게 계속 주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호서(湖西)의 병신년 조의 대동미(大同米)를 결(結)마다 2말씩 감해 주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숙종은 또 손수 화양(華陽) · 흥암(興巖) 두 서원(書院)의 액호(額號)를 써서 걸게 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인주(人主)가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다면 거의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고 사설(邪說)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이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화양은 곧 송시열을 조두(俎豆)하는 곳 이고, 흥암은 곧 송준길(宋浚吉)을 조두하는 곳이다. 서인계의 유림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숙종 후반기에 여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숙종대왕 - 국방에 대한 배려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국방에 대한 배려

 숙종은 효종조 이후부터 있어온 왕조의 북벌의지가 구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주변의 국제적 상황 변화에 국방과 무력강화를 위한 조치가 국론 통일과 사회안정의 시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략(武略)이 강(强)하지 않은 점을 근심하여 매양 교외(郊外)에 거둥하는 기회가 있으면, 노중(路中)에서 조련(操鍊)을 시켰다. 때로 강상(江上)에서 열무(閱武)하거나 후원(後苑)에서 시재(試才)한 뒤 포상(褒賞)을 크게 내려 장신(將臣)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졸(士卒)을 후하게 돌보았다. 일찍이 관수정(關壽亭)의 묘(廟)에 거둥하여 영유(永柔)의 무후사(武侯祠)에 악무목(岳武穆)을 아울러 배향(配享)해 장사(將士)의 마음을 흥기(興起)시킬 것을 명하였다.

 1718년(숙종 44)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숙종은 숙위장사(宿衛將士)를 소견(召見)하여 병으로 시열(試閱)하지 못하는 의사를 면유(面諭)하고 또 주육(酒肉)을 하사하니, 무사(武士)들이 모두 감읍(感泣)하며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왕이 척계광(戚繼光)의 진법(陣法)이 왜적을 방어하는 데는 편리하지만 호족(胡族)을 방어하는 데는 불리하다 하여 여러 장수들에 게 헤아리고 의논하여 변통시킬 것을 명하였다. 또 전란(戰亂)을 예비(豫備)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변고에 대응할 수 없다고 하여,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성(城)을 증축(增築)해 도민(都民)과 함께 입보(入保)하는 계획을 강정(講定)하도록 명하였다. 또 북한(北漢)과 백제 (百濟)의 고성(古城)을 증축하였다.
숙종대왕 - 국방에 대한 배려 (2)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승도(僧徒)를 조발하여 강도에 돈대를 쌓았다. 하교하기를,
“강도는 나라의 보장(保障)이니, 돈대를 설치한 것은 사전에 대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다만 바야흐로 봄을 맞이하여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비록 징발되어 부역에 나가는 일이 없다 해도 침범하여 어지럽히고 농사를 방해하는 우환이 없지 않을 것이니,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이제 근시(近侍)를 보내어 진휼하는 뜻을 선포하고 금년의 전조(田租)를 하사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 1만 명에 가까운 승도가 멀리서 부역하니, 쌀 1석(石) 3승(升)을 나누어 주도록 하고, 만일 함부로 소란을 떨며 시골 마을에 폐해를 끼치는 자가 있을 경우 군율(軍律)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략적 요새만을 수축하는 것이 아니라 군의 편제를 개혁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군제(軍制)를 변통해야 함을 전후로 진달(陳達)하니, 이에 별대(別隊)와 정초(精抄)를 합설(合設)하여 금위영(禁衛營)을 만들었다. 이는 대개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의 의논을 채용한 것이다.

 1688년(숙종 14) 삼사(三司)의 금란(禁亂) · 징속(徵贖)의 제도를 개정할 것과 서로(西路)의 성지(城池)가 무너진 곳을 허물어지는 대로 즉시 보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각 영문(營門)의 군졸(軍卒)들을 징발하여 강도(江都)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중사(中使)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기를,
“너희들의 노고가 실로 많다. 나의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다만 송제(宋帝)가 서쪽으로 원정한 장졸(將卒)들을 걱정한 정도일 뿐이겠는가? 이에 나의 뜻을 선유하는 것이다.”
하고, 또 수령(守令)들에게 명하기를,
“군졸 중에 만약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민간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한 도성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강도 즉 강화도 및 북한산성, 남한산성의 성 축조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 숙종은,
“당초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하고자 하였으나, 논의가 서로 달라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맡은 사무를 게을리하며 세월만 보내 니, 진실로 매우 답답하다. 그러니, 대계(大計)를 빨리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도성(都城)을 잘 보수하면 종사(宗社)가 여기에 있고 인민(人民)이 여기에 있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그 부모와 처자(妻子)를 위해 반드시 힘을 다하여 사수(死守)할 것이요, 또 적에게 제 무기를 빌려줄 근심도 없을 것이니, 계획을 정하여 수축(修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강도 (江都)와 남한산성은 모두 바로 보장(保障)의 땅이니 끝내 버릴 수 없다. 남한산성의 경우 연이어 수선(修繕)하였고, 강도의 경우 토성(土城)을 쌓은 것은 뜻한 바 있는데, 올해 겨우 쌓아놓으면 내년에 즉시 무너져 공력(功力)을 잇기가 어려우니, 내성(內城)을 견고하게 쌓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였다.

 1691년(숙종 17)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북한산(北漢山)에 성(城)을 쌓는 것의 편부(便否)를 진달하게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다. 숙종이 말하길,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都城)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天險)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修築)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전에는 샘물을 염려했지만 지금 들으니 샘물도 또한 풍족하다고 한다.” 하고 성을 쌓기로 결정 하였다.

 군제기강을 위한 왕의 견해를 밝히면서
“평양(平壤)을 수복(收復)한 뒤 선묘(宣廟)께서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후(前後) 승패(勝敗)의 다름을 물으니, 답하기를, `먼저 온 북방(北方)의 여러 장수들은 오로지 오랑캐를 막는 전법(戰法)을 썼기 때문에 패배를 초래했고, 뒤에 온 장수들은 능히 척장군(戚將軍)의 왜구를 막는 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승(全勝)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선묘께서 그 책을 구득(購得)하여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연습하게 하였지만, 지금 살펴보건대, 활용이나 응용방법이 없다. 상량(商量)하여 변통(變通)할 점이 없지 않으니, 병졸을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활법을 강구(講究)하게 하라.” 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숙종대왕 - 민생 안정책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민생 안정책

 숙종조에는 사회안정을 위해 부세제도의 개선과 함께 응급처치적 구휼정책이 자주 실시 되었다. 그것은 제도와 인치에서 비롯된 사회 모순의 심화뿐만 아니라 자연재해적 요소도 크기 때문에 이 시기의 기후조건을 감안 하면서 숙종년간의 왕실의 역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농민층의 부세가 과중함에 따른 사회불안과 이어 왕조재정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효종(孝宗) · 현종(顯宗) 양조(兩朝) 때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는데, 숙종은 계속해서 영남(嶺南)에도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장차 백성의 부세(賦稅) 제도를 크게 변경시켜 양역(良役)의 편고(偏苦)를 덜어 주고, 팔도(八道)의 토지를 개량(改量)하여 경계(經界) 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었다. 말년에 먼저 삼남(三南)의 토지를 개량할 것을 명하였는데, 아직 복명(復命)하지 않은 사신(使臣)이 있고, 양역의 의논은 미처 품재(?裁)하지 못하고 말았다.

 숙종조의 특기하여야 할 경제적 조치는 화폐의 주조와 통용이다. 하교하기를,
“돈은 한 나라의 통화(通貨)이고 백성들 역시 즐겨 사용하니 계속해서 주전(鑄錢)하여 성과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 동철(銅鐵)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작업을 정지하는 날이 많다. 이제 동철 1백 근(斤)을 내리니, 주전에 보태는 자료로 삼으라.” 하였다.
숙종대왕 - 민생 안정책 (2)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또 하교하기를,
“근래에 격쟁(擊錚)이 분운(紛云)한 것은 반드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사정(私情)에 끌리고 형세에 구애되어 잘못된 줄을 알면서 잘못 판결한 소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다면 백성들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형조의 사송(詞訟)이 적체(積滯)된 경우가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다. 간혹 사사로운 뜻에 견제되어서 세월을 지연시키며 곧바로 회계(回啓)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종전의 버릇을 답습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다시 법령(法令)을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중죄(重罪)로 논할 것이다.” 하였다.

 사회안정책 중에서 균역법의 시행은 숙종조의 특기할만한 조치인 것이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진달하도록 하였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이 백골(白骨) · 인족(隣族) · 아약(兒弱)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폐단을 많이 말하여 호포(戶布)를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의논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으니, 대신(大臣) · 비당(備堂) · 삼 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였다. 숙종은 말하기를,
“지금 신역(身役)의 편중(偏重)이 가장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으니, 역(役)을 균등히 하여 폐단을 구제하는 것으로 진실로 호포법(戶布法)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절목(節目)이 결정되기도 전에 듣는 사람들이 먼저 놀라고, 민정(民情)이 소란스러우며 조의(朝議)가 떠들썩하니, 아무리 양법(良法) · 미정(美政)이 있더라도 형세상 과단성 있게 시행할 수가 없다. 지금 우선 정지하여 부의(浮議)를 눌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는 바탕으로 삼고, 연사(年事)를 천천히 보아서 조용히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올해의 흉황(凶荒)은 기호(圻湖)가 더욱 극심합니다. 기전(圻甸) 은 이미 대동(大同)을 감(減)해 주었는데, 이제 만일 호서(湖西)까지 감해 주는 것을 허락한다면, 해청(該廳)의 수용(需用)이 바닥이 날 것이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만일 경비(經費)를 염려하여 전혀 견감해 주지 않는다면, 이는 자못 백성 을 구휼하는 뜻이 아니니, 더욱 극심한 고을 다음가는 고을에 대해서 똑같이 1두(斗)씩 감해 주라.” 하였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금년의 풍재(風災)는 태고 적부터 없던 것이다. 일기 (日記)를 살펴보면 1695년(숙종 21)과 1711년(숙종 37)의 풍재(風災)가 실로 기왕의 분명한 증험이다. 그 응험이 반드시 그 때와 같을런지 비록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근심스러운 단서(端緖)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만일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양향(糧餉)이 가장 시급한데,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저축이 텅 비어 있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듣건대, 호조(戶曹)에서 저축해 놓은 포목(布木)이 있어 그 수량이 꽤 넉넉하다고 하니, 이것을 돌려 쌀로 사들 이든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조치하라는 뜻을 대신에게 이르도록 하라.?br>?하였다. 또 경기(京畿)의 대동미(大同米)와 삼남(三南)의 월과미(月課米)를 합한 1만 석을 강도(江都)에 수송할 것을 명하였다. 훈국(訓局)의 포보(砲保)와 공조(工曹)의 장포(匠布) 역시 쌀로 바꾸어 수송 하도록 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진상품인 인삼(人蔘)은 특별히 절반을 감해 주도록 하였다.
숙종대왕 - 민생 안정책 (3)
제 19대조   이름(한글):숙종대왕   이름(한자):肅宗大王

자연재해가 연이어지는 상황에서 숙종은 하교하기를,
“한발(旱魃)의 참상이 갈수록 더욱 혹독해지니, 며칠 안으로 만약 비가 흠뻑 적시는 은택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천리(千里)가 적지(赤地)가 됨을 면치 못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 말을 하다 이에 미치니, 차라리 스스로 몸을 불살라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싶다. 내가 마땅히 나의 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드릴 것이니, 인구(引咎) · 자책(自責)하는 뜻으로 각별히 말을 만들어 제문(祭文) 가운데에 첨가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또 계속해서
“수재(水災) · 한재(旱災) · 풍재(風災) · 상재(霜災)가 너희들의 화곡(禾穀)을 해쳐 나의 아무런 죄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렁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의 심장이 칼로 베는 듯하고 너희들의 위에 임할 면목이 없다. 다만 바라노니, 너희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참고 아내와 자식들을 보전하여 혹시라도 유랑(流浪)하거나 이산(離散)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바야흐로 입고 먹는 것을 깎고 줄여 너희들을 구해 살릴 계책을 마련하고 있으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여기지 말라. 아! 너희들은 나의 적자(赤子)가 아니냐? 부모가 비록 혹 가난하여 제 자식을 양육하지 못할지라도 어찌 그 자식으로서 부모를 버리고 떠나가는 자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간혹 굶주림에 몰려 도적이 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그것이 본심(本心)이겠는가? 실로 내가 너희들의 생업(生業)을 마련해 주지 못한 데서 말미암아 이미 항심(恒心)이 없고 또 평소의 교화(敎化)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밤낮으로 마음을 썩이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이다. 너희 할아비와 너희 아비부터 우리 조종(祖宗)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그 전리(田里)를 보전하며 편안히 생활하고 즐겁게 일해 온 지 이제 3백 년이 되었다. 지금 비록 곤궁하고 급박하더라도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 유랑하여 이산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찌 착하지 않은 마음을 싹틔워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빠져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생각컨대 경대부(卿大夫)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스스로 보통 백성과는 같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각기 이웃 마을에 권유하여 혹시라도 유랑하여 이산하거나 절도(竊盜)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자급 자족(自給自足)하고 만약 서로 도와줄 형편이 되면 함께 서로 나누어 먹고 혼자만 살려 계획하지 말라 서명(西銘)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요,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다\' 하였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물(物)에 대해서도 도리어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동포에 대해서이겠는가? 내가 백성들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애통한 말을 꺼내니, 마땅히 나를 가엾이 여겨 생각을 돌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에게 선유(宣諭)하기를,
“그대 방백(方伯)들은 혹시라도 편안히 앉아 있지 말고, 여러 고을을 순력(巡歷)해 그 고을 수령을 직접 만나 함께 흉년을 구제할 대책을 의논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만나 조정의 힘써 구휼하려는 뜻을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원한을 품고서 유랑하여 이산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 내가 주자(朱子)가 절강성(浙江省) 동쪽의 구황사(救荒使)가 되었을 때 그 문인(門人)이 기록한 것을 보았더니, 이르기를, `공(公)이 백성의 괴로움을 캐내고 찾아 묻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잠자는 일과 먹는 일까지 폐하기에 이르렀고, 깊은 산골짜기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번 나갈 때는 반드시 가벼운 수레를 탔고, 따라다니는 수행원들을 물리쳤으며, 자신에게 소용되는 물품은 스스로 싸가지고 다니니, 관할 구역 안에서도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관리(官吏)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하고 신칙해 늘 사자(使者)가 경계 안으로 들이닥치는 듯 여기니, 이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 후 입견(入見)하였을 때 효종(孝宗)이 맞이하여 위로하기를, 절동(浙東)에서 애쓴 수고를 짐(朕)이 아는 바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병사(兵使) · 수사(水使) · 수령(守令) · 첨사(僉使) · 만호(萬戶) · 찰방(察訪)과 같은 경우에도 또한 각기 소속된 군사와 백성이 있으니, 각각 백성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굶주림처럼 여기고, 백성들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처럼 여기는 마음을 먹는다면, 어찌 서로 구제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