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대왕 - 시대상 (8)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1652년 호남(湖南)에 기근이 들자 매달 새로 생산되는 찬선(饌膳)을 올리게 되어 있는 것을 가을 추수 때까지 바치는 것을 정지하게 하였으며 공상지(供上紙)와 백면지(白綿紙)도 감하게 하였다. 뒤에 본도에 전염병이 돌아 폐농되었다는 말을 듣고 방백에게 하유(下諭)하여 진구(賑救)하여 살릴 수 있는 방도를 극진히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묵은 전지(田地)를 가꾸게 하였다.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에 흉년이 들었을 적에 더욱 심한 고을은 세금을 완전히 면제시켰으며, 북도(北道)와 양서(兩西)에는 등급을 나누어 사조(賜租)하였으며, 임금에게 올리는 생선도 임시로 감하게 하였다. 겨울에 사옹원이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니, 또 계속해서 두어 해 동안 감할 것을 명하였다. 사옹원이 받아들이는 생어물(生魚物)과 건어물(乾魚物) 가운데 퇴짜놓는 폐단이 많자 척량(尺量)의 한계를 감하도록 명하고 교활한 짓을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1653년(효종 4)에 육진(六鎭)과 삼수 · 갑산이 극심한 재해를 입자 1년 동안의 조세(租稅)를 감면시켰다. 내자시(內資寺)의 공물을 이미 감면시켰기 때문에 3월 3일의 병식(餠食)은 대비전에만 올리게 명하였는데도 내자시에서 대전에도 아울러 올리니, 이에 그 관원을 파직시켰다. 예조가 각 도의 삭선(朔膳)을 다시 설치하게 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삼남(三南)에 여역이 아직도 치성하여 놀랍고 두려움이 실로 절실한데 무슨 마음으로 삭선의 진상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내년의 탄일(誕日)에 있을 방물도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전남감사가 추함(推緘)에 대해 올린 함답(緘答) 내용에,
“납향(臘享)에 진공(進供)하는 노루를 각 고을에서 산 채로 잡아 감영(監營)에 보내고 있습니다.”
한 것이 있었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그 폐단이 작지 않아 내 마음이 불안하니, 납향을 지내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
하고, 해도(該道)로 하여금 그 뒤로는 생포하여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1655년(효종 6)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강계(江界) 등 25개 고을이 재해를 입자 조정에서 세금의 삼분의 일을 감면시켰는데, 감사가 다시 더 감해 줄 것을 청하니 호조에서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특별히 다 감면시켜 주도록 명하였다. 하삼도(下三道)와 동북 양도(兩道)에서 1658년과 1659년에 공납할 세폐(歲幣)의 차목(次木)이 모두 940여 동(同)이고 1659년 삼 남(三南)에서 공납할 상폐목(上幣木)이 88동이었는데 이를 모두 감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숫자는 새로 추쇄한 노비들의 공목(貢木)으로 충당시켰다.
 북쪽 변방에서 곤궁한 나머지 자식을 낳아도 기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랍고 불쌍하게 여겨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잘 타일러 엄금하게 한 다음 각 고을의 자식을 낳은 사람에게 쌀과 장(醬)을 지급하도록 계칙하고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였다.

 호서(湖西)가 임진왜란 때에 병화(兵禍)를 당하지 않은 탓으로 대신 타도(他道)의 부역(賦役)을 감당했었으므로 본디 편중되었다고 일컬어졌었다. 1651년(효종 2)에 상신 김육(金堉)의 의논을 써서 대동법을 행하게 되면서 1결에 10두씩을 거두어 들여 경외(京外)의 비용에 이바지하게 하고 다른 요역은 없게 하자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하늘이 견고(譴告)를 보이는 변이 발생하면 계구(戒懼)가 간절하고도 지극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자문함으로써 재이(災異)를 없앨 방도를 강구하였고 자기 한 몸을 죄책함으로써 사방에 구언(求言)하였다. 피전(避殿)하고 감선(減膳)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 반드시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고쳐 주었다. 그리하여 왕옥(王獄)의 중한 죄수도 사형을 용서받는 경우가 있었다.
효종대왕 - 시대상 (9)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는 그 고통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 비를 비는 데 쓰는 희생(犧牲)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매양 제물을 깨끗이 준비하여 몸소 사사(祀事)를 행하였는데 아무리 타는 듯이 뜨거운 무더위라 해도 관을 벗거나 허리띠를 푼 적이 없이 밤까지 계속하였으므로 그 지성에 감동되어 단비가 금방 내리기도 하였다.
 1658년(효종 9) 6월에 병을 앓기 시작하여 점점 심하여졌다. 7월에 대신(大臣)들을 연견(延見)하였는데, 왕이 전남의 바닷가 백성들에게 부역이 치우쳐서 고통스럽게 가해지고 있다고 하여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대동법을 호서에서처럼 설행(設行)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1659년 봄에 또 가뭄이 들어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었으나 우근(憂勤)으로 피로가 겹친 상태에서도 자주 신료(臣僚)들을 접견하여 빠진 계책이 없이 강구하여 곡식을 옮기고 부세를 견감(줃減)시키는 등 마음을 극진하게 쓰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진휼하는 즈음에는 우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부터 하였으며 경외(京外)에서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였다. 또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마을 사이를 출몰하면서 그 근만(勤慢)을 살피게 하였으며 겸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묻게 하였다. 간절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하교가 계속하여 내려지고 신칙(申飭)시키는 명령이 잇따라 하달되었으므로 대소 관리들이 뛰어다니면서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보리가 날 때까지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없었다.

 군병들의 원통함을 순문(詢問)하니, 백골(白骨)에게 베를 징수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를 군정(軍丁)에 충정(充定)시키기도 하고 늙었는데도 면제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어 억울한 고통이 더욱 극심하였다. 왕은 흉년이 들어 부역을 감면시키는 때에 이들에게만 유독 그대로 징수하는 것은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의의가 아니라고 하여 이에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먼저 제도(諸道)의 감영에 저축된 포목(布木)의 숫자를 묻게 하고 바야흐로 마땅 한 바를 헤아려 은혜를 베풀려고 하였는데 미처 완료하지 못하였다.
 4월 20일 뒤에 병에 감염되었는데도 기우제를 설행하도록 명하였으나 미령하여 직접 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감히 스스로 마음에 편안할 수가 없어 드디어 외각(外閣)에서 재숙(齋宿)하였고 손상을 받아 병이 더하는 것을 돌보지 않은 채 한데 서서 하늘에 빌었으며 하루가 가고 밤이 새도록 관건을 벗지 않았다. 5월 4일 병세가 매우 위독해져 창덕궁(昌德宮)의 정 침(正寢)에서 승하하였다. 춘추는 41세였고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

 효종은 영명(英明)하고 특달(特達)하고 강의(剛毅)하고 관후(寬厚)하였으며, 엄하고도 인자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불세출(不世出)의 자질로 큰 일을 할 뜻을 품었다.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모유(謨猷)는 개연히 옛 도를 사모하였고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밤중에 일어나 탄식하였다. 사냥과 성색(聲色)의 즐거움을 하나도 마음에 둔 적이 없었으며 위로 하늘의 경계를 근신(謹愼)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곤궁함을 딱하게 여겨 하늘을 공경 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뜻이 독실하였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대학연의>의 숭경외(崇敬畏) 상 · 하권을 빼내어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들고 빈풍장과 무일편을 아울러 병풍을 만들어 거기에 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주례(周禮)>의 십이황정(十二荒政)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있는 육정 육사(六正六邪)와 <한서(漢書)>의 자사 육조(刺史六條)도 베껴 써 오게 하여 한가할 때 열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효종대왕 - 시대상 (10)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겼으며 어진이는 목마른 듯이 구하고 재능이 있는 이는 재빨리 발탁하였으며 어진이들이 띠풀처럼 무리지어 나아왔으므로 재야에는 빠진 인재가 없었으며 선행과 절개를 표창하여 드러내어 명성을 심었다. 심지(心志)에 보존되어 있는 것은 곧 국력을 부지하여 기르고 백성을 변화시키는 공이었고, 시조(施措)에 발현된 것은 모두 근본을 공고하게 하고 국운을 영원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며, 아랫사람을 인접하여 수작(酬酢)함에 있어서는 표리(表裏)가 환히 드러나게 하였고,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문답함에 있어서는 깊고 은미한 곳까지 세밀히 분석하였으므로 비록 홍유(鴻儒)라 할지라도 따라갈 수 있는 의견이 없었다. 문장(文章)에 이르러서는 말을 하면 그대로 아름다운 글을 이루어 저절로 전칙(典則)이 완성되었으며 진초(眞草)의 서법(書法)은 새가 날듯 기묘함을 이루었으나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고 말하는 사이에도 결코 언급한 적이 없었다.

 평일 담론한 것은 오직 전모(典謨)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성현의 글과 고금의 흥망에 대한 근원 및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방책에 관한 것뿐이었다. 용잠(龍潛)으로 있을 때는 술을 한없이 마셨으나 세자로 책봉된 뒤부터는 결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필부의 일신을 망치는 것 이 술에서 생기는 일이 많은데, 관직에 임한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술로 인해 말을 실수하는 데에서도 화를 자초하기에 이르기 일쑤이니, 이보다 더 심한 해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근래 사대부들 사이에 명류(名流)라고 호칭되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것을 가지고 서로 훌륭하게 여기면서 마치 진(晋)나라의 풍속에서 예의를 지키지 않고 방임하는 것으로 명망을 얻었던 것처럼 하고 있다. 선부(選部)를 맡은 사람은 주의(注擬)할 즈음에 이러한 무리들은 다른 사람에 우선하여 기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작년에 병이 위독하여져 수저를 들지 않았으므로 외방의 특이한 별미(別味)를 올려 권하였으나 드시려 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 구복(口腹)을 충족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동요시켜 지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송(迎送)의 폐단을 염려하여 진상(進上)을 삼가지 않는 수령들에 대해서도 파출(罷出)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약을 먹으면서 병을 치료하는 상황이었지만 한결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  1658년(효종 9) 겨울 병이 조금 낫자 예관과 대신들이 누차 진하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악정자(樂正子)가 발을 삐었을 적에 다 나은 후에도 수개 월 동안 나오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찰이었다고 걱정하는 안색을 지었던 것처럼 하면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걱정하여 옥체(玉體)가 병들었다는 것도 잊었는데, 거의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오히려 마른 곡식이 소생토록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으니, 이는 실로 지극한 성품이 하늘이 심어준 데 뿌리하고 있는 것으로 억지로 힘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신민들이 더욱 깊이 슬퍼하는 것은, 11년 동안 정신을 가다듬고 수성(修省)하느라고 편안히 쉴 겨를이 없었던 탓으로 한 해도 향공(享供)을 받은 때가 없었고 단 열흘이라도 근심하여 괴로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바야흐로 훌륭한 통치를 도모하여 미처 풍동(風動)시키기도 전에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어진이라면 반드시 얻어야 할 수명(壽命)을 끝내 하늘이 아낌으로써 답답한 한을 품은 채 지닌 웅지를 펼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 점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우리 동방의 끝없는 통한인 것이다.
효종대왕 - 시대상 (11)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효종은 조선의 제 17대 왕으로서 1649년부터 1659년까지 10년 동안 왕으로 있었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과 함께 비빈 · 종실 및 남녀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 및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과 같이 지내면서 형을 적극보호하였다. 즉,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하여 동행을 막았으며, 그 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하여 그를 보호하였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는 그대로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다가 그 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금주위(錦州衛) 송산보(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 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은 데다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 력히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의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키고 김상헌(金尙憲) ·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와 반역적 역관배(譯官輩)인 정명수(鄭命壽) · 이형장(李馨長) 등이 청나라와 은밀히 연결되어 있어 이 들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졌다. 그 결과 즉위 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 : 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실세(失勢)함으로써 이듬해부터 이완(李浣) · 류혁연(柳赫然) · 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하여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본격화하였다. 즉,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600여 명의 군액을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하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하는 동시에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대폭 강화하기 위하여 원두표를 강화도, 이후원(李厚源)을 안흥, 이시방(李時昉)을 남한산성, 홍명하(洪命夏)를 자연도(紫燕島)로 보내어 성지(城池)를 수보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선하는 등 군비의 확충을 적극화하였다. 또한, 표류해 온 네 덜란드인 하멜(Hamel, H.) 등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수보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하여 염초(焰硝) 생산에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단히 직접 관무재(觀武才) 등에 참가하여 군사훈련 강화에 노력하였다. 1655년 8월에는 능마아청(能쬱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로 하여금 강습권과(講習勸課)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 는 금군의 군복을 협수단의(夾袖短衣)로 바꾸어 행동에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어린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효종의 군비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하여져 북벌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다만, 군비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나타났다.
효종대왕 - 시대상 (12)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한편, 효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질서 확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에는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화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행전(行錢)의 유통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시키는데 노력하였다. 한편, 문화면에 있어서도 1653년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법(曆法)을 개정하여 태음력의 옛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하였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 간행하였으며, 공주목사 신속(申첔)이 엮은 <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하여 농업생산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1656년에는 전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쓴 <경민편(警民篇)>을 간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선조실록>을 다시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 간행하였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확충에 전념한 군주였으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뜻이 맞지 않는 괴리현상이 일어나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종대왕 - 생애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생애

 현종대왕(이하 현종이라 함)의 휘(諱)는 연(?)이며 자(字)는 경직(景直)이다. 효종의 아들이고 인조의 손자이다. 어머니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는 의정부 우의정 장유(張維) 의 딸이다. 효종이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에 심양(瀋陽)에 볼모로 들어갔는데, 1641년(인조19) 2월 4일에 심양 관소에서 현종을 낳았다.

 왕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두세 살 적부터 행동거지가 범상하지 않았는데, 4세에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다. 무엇을 물을 때마다 어른처럼 대답하였으므로 인조는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여러 왕자 · 왕손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는데, 인조가 항상 말씀 하기를,
“이 아이는 보통 아이와는 매우 다르니 내 뒷날의 근심이 없겠다.”
하였으니, 무척 기대한 바가 컸던 것이다. 이 때 효종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였는데 왕이 부모를 사모한 나머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적마다 축원하기를,
“부모가 어서 돌아오게 하여 내가 뵐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적마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 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보았다.

 현종은 5세 때에 궁중 안의 시아(侍兒)가 쑥대 화살[蓬矢]로 그의 동기를 쏘아 눈을 다치게 했다는 말을 듣고 골육을 해친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그를 멀리 내쫓아 버렸다.
 효종이 심양에서 연경(燕京)을 가게 되어 왕을 본국으로 보냈는데, 돌아와 인조를 뵈었을 때 응대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었다. 인조가 요순(堯舜) · 걸주(桀紂)에 대하여 물었는데 그때 왕은 증선지(曾先之)가 쓴 <사략(史略)>을 읽고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그 책 속의 문구들을 낱낱이 들어가면서 성군이 되고 폭군이 된 이유를 입증하였으므로 인조가 그 대답을 듣고는 유별나게 사랑하였다.

 한번은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피(豹皮)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왕의 나이 이 때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모가 쓰는 의복이나 거마(車馬), 그리고 기용(器用)에 있어서는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공경을 다해 다루고, 감히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때로 여염집에 나가 임시 거처하면서 부모가 원하지 않는 바는 감히 행하지 않았는데 곁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가까운 이웃 중에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어 시자(侍者)가 꾸짖어 금하자, 왕이 말리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번은 궁중에서 나오다가 떨어진 옷을 입고 얼굴색이 검은, 대궐문 밖을 지키는 군졸을 보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하니, 시자(侍者)가 대답하기를,
“얼고 굶주려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왕이 탄식하다가 옷을 주도록 명하고 또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남은 밥을 계속 주되 그가 천경(踐更)을 마칠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곤궁하여 굶주린 사람을 볼 적마다 불쌍히 여기고 반드시 구휼해 주었다. 어렸을 적에 나타난 그의 효성과 우애 그리고 자애와 밝은 덕이 이와 같았다.

현종대왕 - 생애 (2)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1649년(인조 27) 2월에 인조가 인정전(仁政殿)에 친히 납시어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하였는데, 자태가 우뚝하고 의도(儀度)가 한아(閑雅)하였으므로 백관이 서로 하례하였다. 강서원(講書院)을 설치하고 강관(講官)을 두었는데 학문에 더욱 부지런하였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주(註)까지 정밀하게 잘 외웠으므로 강관이 탄복하였다. 이 해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를 잇자,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보도(輔導)가 더욱 갖추어지니 슬기로운 덕이 날로 진취하였다. 효종이 또 세자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고 일찍이 농부로 하여금 후원(後苑)에 들어와 밭을 갈게 하고는 세자에게 보도록 하니,
“소가 사람에게 공이 있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게 이와 같은가 봅니다.” 하였다.

 왕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무릇 한 번 보고 들은 것마다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맹자(孟子)>를 다 읽고 나자, 효종이 시험해 보려고 일시에 모두 외우게 하였는데, 7편을 다 외우는 동안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효종이 매우 놀라고 기뻐하였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독서하는 일이 아니면 부모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부모의 몸이 편치 못하면 밤낮 으로 부축하고 시중을 들며, 비록 물러가 쉬라고 명하여도 물러가지 않았다.

 1651년(효종 2) 11세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왕비 김씨는 중종조의 현신 대사성 김식의 6대손이며 영의정 김육의 손녀이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12세에 입학(入學)하는 예를 행하고 선성(先聖)에게 전을 드리며 배알하였다. 이어서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다. 예의에 맞는 거동이 장엄하고 중후하며 강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 주위에서 듣는 선비들이 너나없이 감탄하며 기뻐하였다.
 1659년 5월 4일에 효종이 승하하자, 왕이 상막(喪幕)에서 상(喪)을 주관하면서 상례를 옛날 예법대로 하며 슬퍼하고 야위움이 <예경(禮經)>보다 과도하게 하였다. 5일이 지난 9일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의 나이 19세였다. 학문에 마음을 두어 의리를 강구하고, 질병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경연에 나갔다. 또 전대의 역사를 강구하기를 좋아하 여, 그 임금의 수덕(修德) 여부와 정치의 득실, 민생의 고락에 대해 부지런히 토론하여 거울로 삼았다. 견해가 고명하여 항상 강관(講官)의 견해보다 뛰어났다.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이미 심리학에 뜻을 두어 선유(先儒)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서 들이게 하여 살피고 음미하는 자료에 대비하였다. 일찍이 <대학(大學)>을 강할 적에 현종은,
“몸을 닦는 데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이르기까지 경(敬) 자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하고, <중용(中庸)>을 강할 적에,
“사람이 도(道)를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어떤 것이 비근(卑近)한 것이고 어떤 것이 고원(高遠)한 것인가?”
하니, 강관이 아뢰기를,
“사람의 일이 비근한 것이고 불씨(佛氏)와 노자(老子)의 교리(敎理)가 곧 고원한 것입니다.”
하자, 현종은
“반드시 불씨와 노자(老子)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곧 고원한 것이다.”
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할 적에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방법이 이 책에 모두 구비되어 있다. 비록 격물치지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의(誠意)를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다 공 력을 쓸 수 있겠는가. 또 반드시 성의의 공부가 있어야만 격물 · 치지한 바가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현종대왕 - 생애 (3)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서경(書經)>을 강할 적에 익직편(益稷篇)의 `제(帝)여, 제위(帝位)에 계심을 삼가소서\'라는 대목에 이르자, 현종은
“임금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도리는 삼간다는 신(愼)의 한 글자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기미를 생각하여 편안함을 생각한다[惟幾惟康]\'는 것은 대개 공부하는 데 매우 요긴한 곳을 말한 것이다. 기미[幾]란 생각하는 시초이고 편안함[康]이란 안락한 즈음이니, 더욱 삼가해야 한다.”
하였다. 역대의 일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자질이 높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배운 바가 다만 황제(黃帝) · 노자(老子)의 도(道)였으므로 몸소 현묵(玄默)을 행하느라 옛날 성왕(聖王)의 정치를 회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이에 대해
“옛 사람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 하였는데, `겨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한
“한 무제가 제 양공(齊襄公)이 복수한 말을 인용한 것을 살펴보면 규모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력을 함부로 남용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지 않은 것은 윤대(輪臺)의 뉘우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무력을 함부로 남용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한 고제(漢高帝)가 평성(平城)의 근심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질이 이와 같았으므로 말년에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윤대를 버리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또한 신선 구하는 일을 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이 군사를 일으킬 때의 일에 이르러서 장관으로 하여금 범엽(范曄)이 논단한 사평(史評)을 읽게 하였다. 현종은
“아버지를 협제(脅制)하고, 오랑캐를 신하로 삼았다는 설은 더욱 준절(峻截)하다.”
하였다. 건성(建成)의 일을 논하기를,
“명나라 태종조(太宗朝)에 한왕(漢王) 고후(高煦)는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였으나, 인종(仁宗)이 태자가 되어 은혜와 사랑으로 대우하니, 인종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였다. 가령, 건성이 태종을 이와 같이 대우하였더라면 어찌 피를 흘리는 변고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모 술수에 가깝습니다.”
하니, 현종은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이것은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것이다.”
하였다. 송 진종(宋眞宗)이 천서(天書)로써 태묘(太廟)에 고한 것에 이르러 이르기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을 속일 수 있겠는가. 진종의 초기 정사는 또한 볼 만하였는데, 간사한 소인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 그 마지막을 잘 끝내지 못하였으니 심히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현종이 경연에 임하여 강논한 말 중에 아름다운 말이 매우 많았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강을 정지하던 날에는 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기를 고열(考閱)하여 정치하는 데에 절실한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써서 올린 바의 고사가 볼 만할 뿐만 아니라, 또 풍자하고 깨우치는 뜻이 많으니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밤에 측근의 신하를 불러 보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마하고 백성의 일에까지 물으니, 정의가 서로 부합되어 마치 가정의 부자 사이와도 같았다. 왕이 눈병이 있었으나 촛불에 책을 보았다. 신료들이 더 덧칠까 두려워하자, 현종은 말 하기를,
“겨울밤이 매우 길고 또 내가 잠이 없어 삼경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 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눈병이 심해지자, 옥당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써서 올리게 하되 그 글자를 크게 써서 열람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비록 병환 중에 있었으나 학문에 항상 이와 같이 힘썼다
현종대왕 - 생애 (4)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대신을 예우하여, 말을 하면 의견을 굽혀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이 들면 의원과 약을 보내 문병하고 죽었을 경우에는 상(喪)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그대로 주고 혹은 제수(祭需)까지 주었으며, 혹은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특별히 하사한 적도 있었다. 유학(儒學)을 중시하는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송시열 · 송준길 등을 대접함에 있어 은우(恩遇)가 매우 융숭하였으며, 이유태 · 이상(李翔) 등 여러 사람도 초빙하여 아울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마침내 의정(議政)에 제수되고, 송준길은 지위가 삼재(三宰)에 이르렀다. 송시열 · 송준길 등이 예를 그르친 일이 발각되게 되자, 사당(私黨)을 지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마음을 갖고서 효종의 능을 옮긴 뒤에 소를 올려 뒤늦게 지난 일을 탓하니, 왕이 그의 편벽됨을 미워하여 대우가 약해졌다.

 처음 현종이 송시열 등을 대우할 적에 정성과 예의가 아주 지극하여 전고보다 특출하자 조정과 재야에서 그들의 풍채를 사모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잘 받들지 못하고 도와주는 바가 없어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좌우의 두세 명 신하에 이르러서도 그들이 이끄는 대로 행동만 한 채 국사를 담당하고 보필하여 공적을 이룬 게 없었으므로, 백성 들이 모두 `임금은 있으나 신하는 없다\'고 탄식하였다.
 현종은 여러 신하를 매우 너그럽고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임금 노릇하는 도리는 아랫사람에게 시기와 의심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이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므로 오직 성의를 미루어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써 비록 남을 공격하고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정직한 체하는 자일지라도 반드시 받아들여 너그러이 용납하고 혹은 포상하여 장려하기도 하였다. 비록 초야의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택하여 기록하게 하고 혹은 벼슬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화재로 집을 잃은 측근의 신하가 있었는데 특별히 호조에 명하 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들이 죽었을 때 노고한 행의(行誼)가 있거나 혹은 청렴 근신(謹愼)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관례로 보내는 부의(賻儀) 이외에 별도로 관재(棺材)를 하사하고 혹은 상수(喪需) · 제수(祭需) 및 일꾼을 보내 도와주고 아울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의 굶주림과 추위를 구제해 주었으며, 작고한 훈신(勳臣)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청나라에서 사사(査使)를 보내어, 의주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본부의 사람이 강을 건너가 나무를 베게 허락하였다 하여 사형으로 단안을 내렸다. 현종은 이 일에 대해 반복하여 굳이 변론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특별히 이시술에게 금 500근을 주어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화를 해결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사관(査官)을 특별하 게 접대하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구하였는데, 이시술이 이에 힘입어 완전히 모면하였다. 신하를 자신의 몸처럼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조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을 고민하여 매양 서로 삼가고 협력하는 도리로 책려(策勵)하고, 방백과 수령이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적에는 병이 있지 아니하면 곧 불러보고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물어본 다음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방도를 거듭 일러주었다. 또 전임(前任) 때의 폐막을 묻고는 아뢴 바에 따라 곧 변통하게 하였다.

 인재를 수용(收用)하되 먼 지방의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서북(西北) 양도(兩道) 지방은 길이 멀고 제주(濟州)는 바다 속에 있다 하여 특별히 중신과 근신(近臣)을 보내어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게 하니, 먼 지방 사람이 모두 고무되었다. 향천(鄕薦)의 법을 거듭 밝히고 또 재신(宰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인재를 별도로 천거하게 한 다 음 재능이 특이한 자가 있으면 평상의 격례에 구애하지 않고 발탁해 썼다.
현종대왕 - 생애 (5)
제 18대조   이름(한글):현종대왕   이름(한자):顯宗大王

 또 항상 이조에 신칙하여 전사한 사람 및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혼조(昏朝) 때 원통하게 죽은 사람에 있어서도 증직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충신 · 현사(賢士) 중에 특출한 자는 모두 기록하여 사당을 세우거나 관작을 추증하기도 하고 혹은 비를 세우거나 무덤을 표지(表識)하기도 하고 그 후예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그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기도 하는 등 표창하는 은전이 거의 빠뜨림이 없었다. 효자나 열녀 중에 행실이 드러난 자에게는 곧바로 정문을 세워서 표창하였는데, 서민과 노비에게도 두루 미치었다. 한 번은 경연의 신하와 세조 때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의논하게 되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삼문 등은 명나라 방효유(方孝孺) 등과 같은 사람이다.”
하였으니, 충의(忠義)를 포상하고 높이는 뜻이 이와 같았다.

 백성의 일은 지성으로 근심하고 노고하였다. 만일 상위(象緯)의 변고나 수재 · 한재를 만나면 곧바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자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는데, 전후로 내린 애통한 교서가 신민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비가 내리기를 빌 적마다 친히 제사지내지 않더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재계한 다음 밤새도록 한데 서서 묵묵히 기도하고 기우제를 파할 때가 되어서야 편히 쉬었다.

 만일 재난과 흉년을 만나면 신료들을 불러들여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계책을 강구하고 진구하는 정사를 크게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고 포흠진 것을 감면하며 혹은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기도 하고 혹은 죽을 쑤어 그들을 먹였다. 돌림병이 나돌면 양의(良醫)를 나누어 파견하여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였다. 또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여제를 지내고 국상에게 제사지냈다. 그리고 조석으로 공급하는 어주(御廚)의 물품을 절약하고 초하루와 명절에 올리는 외방의 공물 헌납을 정지하고, 주방(酒房)을 파하 고, 어구(御廐)의 말을 방출하였으며, 공상(供上)하는 일용의 물품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재량하여 줄였다. 또 내장(內藏)과 각 아문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진휼에 돕게 하였는데, 곤궁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나, 오래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먹는 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 리가 편치 않았다. 만일 한 가지라도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아까운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진휼을 파한 뒤에 또 어사를 보내어 제도(諸道)의 수령이 진휼의 정사를 잘 거행했는지의 여부를 염탐하게 한 다음 승진시키거나 벌을 주었다. 경술 · 신해 두 해에 이르러서는 팔도가 크게 기근이 들고 이어서 큰 돌림병이 떠돌았다. 현종은 밤낮으로 애태우며 성의를 다해 이들을 구제하되 더욱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다.
 1672년(현종 13) 봄에 국내에 선유(宣諭)하여 여러 해 동안 포탈된 부세(賦稅)를 모두 탕감하게 하고 이어서 죄수 및 폐고(廢錮)된 사람을 모두 처결하여 방면하고 서용(敍用)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크게 흉년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나 포악한 백성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외(中外)에서 물 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서 죽거나 맹수에 해독을 입은 자가 있다고 아뢰면 또한 반드시 돌보아주게 하였다. 겨울철에 호위하는 병사가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동옷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