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대왕 - 생애 (10)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주강(晝講)을 마치고 송준길(宋浚吉)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천변(天變)이 없는 때가 없는데 매년 이러하니 성심(聖心)의 계구(戒懼)가 아마도 한결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 왕이 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으니 실로 찬선(贊善)의 말과 같다. 간혹 심상히 여겨 방과(放過)한 때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명나라의 일에 언급되자 왕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숭정 황제가 망한 것은 실로 환관에 연유된 것이다. 그들을 주군(州郡)으로 나누어 파견한 것은 지방관의 선악(善惡)을 살피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사사로이 뇌물을 받는 것을 이롭게 여겨서였던 것이다. 외방의 일을 은밀히 염탐하는 것이 실은 정도(正道)가 아닌 것인데 더구나 잡류(雜流)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준길이 이어 백성의 고통을 구출하고 경연을 자주 열어야 된다는 내용으로 진달하니, 왕이 모두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4월에 <심경>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가만히 있을 적에 항상 공경하고 말하지 않을 적에 항상 조심하면 언동(言動)을 기다릴 것도 없이 믿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이 말 이야말로 가장 음미하여 깊이 생각해야 될 곳이다. 그러나 그 요점은 힘써 행하는 데 있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 또한 거짓인 것이다.”
하였다.
 5월에 소대(召對)할 때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송 고종(宋高宗)은 경구(驚懼)하는 생각을 많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성취한 것이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당시 금릉(金陵)에 머물기를 권하기도 하고 변경에 머물기를 권하기도 했는데 변경은 그래도 두려워할 수 있는 곳이지만 금릉에도 끝내 한 걸음도 나아가 보지 못했다. 그의 경구하는 마음이 이 와 같았기 때문에 종택(宗澤) · 이강(李綱) · 악비(岳飛) · 한세충(韓世忠) 같은 이가 있었는데도 기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효종(孝宗)이 이때의 세상에 태어나서 이 사람들을 기용했다면 하북(河北)을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진회(秦檜)의 마음을 가장 알 수 없다. 정승이 된 뒤에 어찌하여 금(金)나라를 배반하지 않고서 전적으로 남방(南方)에만 뜻을 두었단 말인가. 한세충이 나귀를 타고 서호(西湖)에 노닌 일과 악비에 대해 막수유(莫須有)라고 한 말에 대해서는 송 고종을 위하여 개탄스러움을 말하 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1월의 소대(召對)에서 왕이 이판(吏判) 송시열(宋時烈)에게 이르기를,
“송 신종(宋神宗)이 명도(明道)를 대하여 인재가 없음을 탄식하니, 명도가 말하기를, `지금이라고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였으나 신종은 결국 명도가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명도가 삼대(三代) 때의 일을 가지고 진달하니, 신종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 하자, 명도가 추연(湫然)히, ` 이는 사직(社稷)의 복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명도의 마음은 이렇게 컸는데 신종의 뜻은 저렇게 작았으니, 맡길 만한 인물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자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일에 대해 지금 사람이 추후 개탄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일에 대해 뒷사람이 다시 개탄한다면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2월의 소대에서 송시열이 왕의 성품이 편협함을 논하면서 화평스럽게 하는 방도를 극진히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어찌 나의 병통을 모르겠는가. 나의 병통은 기질 이 편협한 탓으로 바야흐로 노여워할 때에는 일의 시비를 모르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에 중도(中道)에 맞지 않는 것이 있게 된다. 그래서 근일 이래로 노여워할 일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참음으로써 그 병통을 다스리고 있는데 밤중에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노여움이 점차 풀렸다.?br>?하였다.
효종대왕 - 생애 (11)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1659년(효종 10) 2월의 소대에서 경(敬) 자에 대해 논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사람은 반드시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고 고요히 있어야 할 때는 고요히 있은 뒤에야 공부가 바야흐로 전일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고요한 데에만 빠진다면 어떻게 그것을 경(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의 소대에서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은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재물을 축적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 영제(漢靈帝)는 돈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짐이 사제(私第)에 있을 적부터 너를 사랑한 지 오래되었다\' 하고는 벼슬을 팔아 돈을 거두어들임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렇게 사리에 어 긋나게 들어온 돈이 사리에 어긋나게 나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일반 금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용(龍)은 사령(四靈)의 장(長)인데도 가끔 미끼를 탐하다가 죽는데 이는 욕심에 연유된 것이다.”
하였다.

 <심경>을 강할 때부터는 송준길이 자주 시강(時講)하였는데, 1658년 겨울부터는 송시열도 교대로 나아가 시강하였다. 그리고 기타 유술(儒術)로 나온 사람들도 아울러 윤번으로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따라서 마음 공부에 진보되고 유익한 점이 많게 되었다. 효종은 성품이 편협하여 극복하기 어렵고 노여워할 때가 가장 극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해서 항상 깊이 반성해 서 결국에는 수습하여 안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일찍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 착공(着工)에 절실한 것이니 의당 병풍을 만들어 좌우(座隅)에 두어야 한다고 여기고 옥당의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베껴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그리고 당우(堂宇)의 문달(門쩋)에다 경계하는 내용의 말을 게시했으며, 큰 글씨로 `마땅히 분음을 아껴 상제를 대한 듯이 해야 한다[當惜分陰對越上帝]\'는 여덟 글자를 써서 벽에다 붙였다. 재(齋)는 경의(敬義)라고 명명하고 합(閤)은 양심(養心)이라고 명명했는데 모두 스스 로 경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효종에게는 적사(嫡嗣)는 곧 현종이다. 인효(仁孝)가 일찍부터 드러났으므로 인조조(仁祖朝) 1649년 봄에 세손으로 봉하였다. 그러다가 효종이 즉위한 3년 뒤인 1651년 가을에 세자로 봉하였는데, 왕이 매우 애지중지하였으나 가르침은 엄절하여 궁료(宮僚)를 간택하여 날마다 경사(經史)를 강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찬선(贊善) · 진선(進善) 등의 관직을 유현(儒賢)에게 제수하여 돌려가면서 권면하고 계도하게 하였으므로 점차 고명한 경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궁관(宮官)들에게 하교하기를,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반복하여 진설(陳設)하되 고금의 득실(得失)과 여염의 이병(利病)에 대해서도 모두 인유(引喩)하여 깨닫게 하라. 제왕가(帝王家)의 자제들은 깊은 궁중에서 낳아 자라기 때문에 민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모르기 일쑤이니, 후원(後苑)에 벼를 심고 경운(耕耘)할 때 세자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함으로써 백성의 일을 알게 하라.”
하고 또 찬선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바로 학문을 할 때가 되었으니 찬선 같은 사람이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을 다하여 보도(輔導)한다면 그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왕이 신료(臣僚)들에게 보도하여 주기를 기대한 것이 매우 간절하였는데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치의(緇衣) 정도뿐만이 아니어서 존경하고 예우하여 초치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았다.
효종대왕 - 생애 (12)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효종은 1왕후 3후궁에 1남 7녀를 두었다. 인선왕후 덕수장씨는 인조반정 공신인 우의정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효종보다 한 해 앞선 1618년(광해군 10) 12월 25일에 출생하였다. 1631년(인조 9) 14세로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이던 효종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초봉되고 1645년(인조 23)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돌아와 변사하자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세자빈이 되었다.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심양(瀋陽) · 연경(燕京) 등지에서 볼모살이를 할 때 함께 가서 타국생활을 하였다. 1649년(인조 27)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고 그 10년 뒤인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승하하고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다. 1674년(현종 15) 2월 24일에 승하하니 수가 57세였다. 사후에 인선(仁宣)의 시호를 받고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岱里)에 있는 영릉(寧陵)에 효종과 같이 안장되었다. 신위는 종묘의 정전 제9실에 봉안되었고 정범 경렬 명헌(貞範敬烈明獻)의 존호를 가상(加上)받았다.

 소생은 1남 6녀인데 1남은 현종이다. 딸은 1녀가 숙신공주(淑愼公主)로 2세 때 등에 업혀 볼모지인 만주의 심양으로 가던 길에 병사(病死)했다. 2녀는 숙안공주(淑安公主)로 익평군(翼平君)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하고 3녀는 숙명공주(淑明公主)로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하가했다. 4녀는 숙휘공주(淑徽公主)로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하가하고 5녀는 숙정공주(淑靜公主)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하가했으며 6녀는 숙경공주(淑敬公主)로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蒙鱗)에게 하가했다.

 효종의 제1후궁은 안빈 이씨(安嬪李氏)로 효종의 7녀 숙녕옹주(淑寧翁主)를 낳고 1693년(숙종 19) 10월 23일에 별세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있다. 숙녕옹주는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하가했다.
 효종의 제2후궁 숙원 정씨(淑媛鄭氏)와 제3후궁 숙의 김씨(淑儀金氏)는 다 소생이 없고 기록도 미상이다.
 효종은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의 존호(尊號)가 올려지고, 묘호(廟號)를 효종(孝宗)이라 하였다. 그 해 10월 29일에 능호를 영릉(寧陵)이라 하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장사하였으나 뒤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효종대왕 - 시대상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시대상

 즉위 초에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 · 송시열(宋時烈), 전 자의(諮議) 권시 · 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 등이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왔는데 그들 의 여식(旅食)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궁인을 시켜 고기와 양식을 계속 보내게 하였다. 시열과 유태의 어미가 늙고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관찰사로 하여금 미찬(米饌)과 약물(藥物)을 보내주게 하였다.

 또 김집을 예조참판에 특배했는데, 이조에서, 예관은 반드시 문관을 쓰는 것이 법이라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옛 것을 상고하면서 글을 읽은 사람을 불러서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상규(常規)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집은 한 해 안에 이조판서에까지 뛰어올렸는데 뒤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으로 판중추로 올렸다. 임금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유림(儒林) 영수(領袖)의 상사(喪事)를 애도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송시열에게도 특별히 예조참판을 제수하였는데, 송준길과 함께 아경(亞卿)을 거쳐 서로 앞뒤로 이판과 병판이 되었다. 권시는 진선 · 집의를 거쳐 동부승지에 진배(進拜)되었고 곧이어 찬선이 되었다. 최온은 누차 대부(臺府)를 거쳐 승지로 뛰어 올려 제수하였다.

 심광수(沈光洙)가 부친상을 당하자, 왕은 예전에 선생이었다고 하여 문안하고 약료(藥料)와 식물(食物)을 지급하였으며 상기(喪期)가 끝나자 헌직(憲職)을 거쳐 발탁하여 은대(銀臺)에 두었다. 허목(許穆) 또한 임하(林下)에서 일어나 지평 · 장령에 제수되었다.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적에는 털옷을 하사하여 덮어주고 내의를 보내어 구료했으며 그가 죽었을 때에는 호조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상사를 다스리게 하는 한편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의금(衣衾) · 관염(棺斂)을 예(禮)를 갖추어 극진히 하였으며 관곽과 분묘에 드는 비용도 모두 관(官)에서 갖추어 주게 하였다.

 유명(儒名)이 있는 사람은 모두 수소문하여 기용하였다. 이들을 돌보는 마음이 매우 우악(優渥)하여 유현을 숭상하는 성대함이 시종 한결같았다.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있지 않았던 일이다.
 선조(先朝)의 기로(耆老)인 훈구 대신에게는 예를 지키고 존경함이 융숭하고도 특이하였으며 은수(恩數)도 높고 중하였다. 나이 많은 달존(達尊)으로서 걸음을 잘 못 걷는 김상헌(金尙憲) 같은 경우에는 대궐에 들어올 적에도 견여(肩輿)를 타도록 명하였고 전상에 올라올 적에는 내관(內官)이 부축하게 하였다. 선조에서 견벌을 받았더라도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고 재식(才識)이 쓸 만한 것이 이경여(李敬輿) 같은 경우에는 기용하여 의지하면서 수상(首相)에 제배하기도 하였다.

 먼 변방에 유배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본조(本朝)에서 죄를 진 것이 아닌 경우에는 수찰(手札)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잇따라 물품을 선사하였으며 대군(大君)을 보내어 면려하여 결국은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구마(廐馬)와 문표(文豹)를 내려주기도 하고 좋은 술과 맛난 음식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철따라 나는 산물과 제철 과실 등 특이하게 맛있는 것을 하사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분묘(墳墓)를 성알(省謁)하겠다고 고하면 전의(奠儀)를 갖춰 지급해 주었으므로 은택이 천양(泉壤)에까지 두루 미쳤으며, 휴가 받아 지방으로 나가면 방백(方伯)에게 하유하여 특별한 향유(餉遺)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편전으로 불러들여 술을 하사하여 권하기도 하였으며, 병이 들면 반드시 어의(御醫)를 보내고 내약(內藥)이 뒤따랐으며, 소회를 진달하면 흔연 히 받아들여 시행하였고 또 반드시 선소(宣召)하여 마음을 열어 면유(面諭)하였으며,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두 자문(諮問)한 뒤에 행하였다.
효종대왕 - 시대상 (2)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신서(臣庶)들에게 조림(照臨)함에 있어서는 작은 것이라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역 땅에서 죽음을 당한 경우에는 특별히 그 집을 구휼하였고, 다른 나라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는 경우에는 그 처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부모의 봉양을 위해 걸군(乞郡)하는 경우에는 그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었고, 어버이에게 병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구료하여 낫게 하였고, 자신의 병이 중한 경우에는 품계가 낮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재신(宰臣)으로서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경우에는 매달 녹봉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을 측은히 여기고 추증(追贈)하는 은전이 널리 서관(庶官)에게 가하여졌다. 관리가 되어 치적이 으뜸인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하였고 죽은 뒤에도 잊지 않았으며, 편관(編管 : 입묵(入墨)시켜 귀양 보내는 일)된 사람이 부모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놓아주어 분곡(奔哭)하게 하였으며, 국사를 위하여 죽었는데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사유(赦宥)가 그의 조카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호조에서 국고가 고갈되었음을 고하자 비변사에서 백관들의 녹봉을 감할 것을 청하고 승정원도 이를 계속하여 아뢰고 대신(大臣)들도 거듭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첫째는 충신(忠信)으로 대하고 녹봉을 중하게 주라는 것은 성인(聖人) 의 훈계인데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는 더욱 깊이 유념해야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공(御供)을 줄이지 않은 것이 아직 많으니 다 줄인 다음 다시 의논해야 할 것인데 부비(浮費)는 모두 절감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조종조 때에는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매우 돈독했는데 지금에 와서 너무 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녹봉을 감하지 않았는데도 경비가 지탱되었다. 이는 뭇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는 극진한 뜻에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또한 언로(言路)를 열어 말을 하도록 계도(啓導)하였으며 소장을 올려 폐단을 말하거나 잠언(箴言)을 올려 규풍(規諷)하는 사람이 있으면 호피(虎皮)나 표피(豹皮)를 하사하기도 하고 마장(馬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홍문관의 학사(學士)는 홍문록에 기록된 사람을 쓰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의 말이 정직한 것을 가상하게 여긴 경우에는 죄를 사면시키고 곧바로 수찬에 제배하였으며, 과감하게 간쟁하는 사람은 삼사의 관원으로 자주 발탁, 기용하기도 하는 한편 돌려가면서 교대로 인견하여 잘못을 규핵하는 책임으로 면려시켰다.
 사람을 기용할 적에는 항상 양전(兩銓)을 단속하였는데 대간과 수령은 더욱 신중히 가리게 하였다. 명현(名賢) · 양상(良相)과 충신 · 효자 · 청백리의 자손은 모두 녹용(錄用)하게 하였으며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여 아름답게 여김으로써 퇴폐 풍속을 면려시켰다. 고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자손이 미미한 탓으로 묘도(墓道)에 묘표(墓表)조차 없다는 말을 왕이 듣고서는 본 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은 예로부터 충신으 로는 조헌(趙憲) 같은 이가 없다고 여기고 그 자손들을 먼저 서용하라고 특명하였다. 고 우상 김상헌(金尙憲)을 영의정으로, 고 참판 정온(鄭蘊)을 판서로 추증(追贈)하였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경민편(警民篇)>을 간행하여, 보고 감동을 느끼게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각 도의 감사 · 병사 · 수사와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배사(拜辭)할 적에는 조용히 사대(賜對)하여, 관원을 출척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져 사랑하는 방도에 대해 자상하게 일러 주었다. 어사(御史)를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고을과 변진(邊鎭)을 염찰(廉察)하게 하고 선악의 정상을 알게 되면 그에 따라 상벌을 가하였다. 그리고 먼 변방의 병민(兵民)들 은 왕화(王化)에 젖지 못했다는 것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병사 및 양계(兩界)의 변방 수령은 간간이 문관(文官)으로 차견하였다.
효종대왕 - 시대상 (3)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백관들이 나태할 것을 염려하여 하교하기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재주이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지 못한 것은 뜻이다. 재주는 본래 얻기가 어렵겠지만 뜻 또한 부지런하지 않다면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했는데, 모든 관사 가운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그 때마다 벌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먼저 기강을 확립하여 백집사(百執事)가 모두 자기의 직무에 부지런하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백사(百司)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있다. 좌기(坐起) 같은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일체 폐기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우려스럽게 여긴다. 전곡(錢穀)의 직임은 더욱 자주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바꾸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집리(執吏)가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지금부 터는 매달 삭말(朔末)에 육조와 한성부 · 장례원은 각기 해사(該司)의 좌기한 일수(日數)를 써서 들여 오게 하라. 이에 의거하여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겠다.”
하였다. 이로부터 각 사에서 좌기했는지 안 했는지를 매달 써서 아뢰게 되었다. 그 뒤 헌부에서 한 번만 좌기하자 하교하기를,
“법관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백사(百司)를 규정(糾正)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전 대사헌 이하를 아울러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붕비(朋比)하는 습관을 매우 증오하여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신하들이 붕당(朋黨)을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록(爵祿)에 대한 계교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임금에게 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부귀는 저절로 오는 것인데 무엇 때문 에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영구(營救)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 정적(情迹)이 탄로가 나서 결국 죄려(罪戾)를 면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나는 기필코 사문(私門)을 타파시키고 국사가 수거(修擧)되게 하고 싶다.” 하고 또 이르기를,
“붕우(朋友)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 따라서 술자리에서도 의당 서로 선한 일을 하도록 책하는 도리로써 면려해야 되는 것인데, 지금은 모두 잡되게 친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다. 그리하여 조신(朝紳) 사이에도 각기 붕당을 만들어 잘못을 덮어줌으로써 함께 붕당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인견할 때 뭇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 다. 명(明)나라와 우리 나라의 혼조(昏朝) 때의 일이 멀지 않은 귀감이 된다. 지금 명공(名公) · 대부(大夫)들에게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대신과 공경들은 다시 더욱 풍속을 면려하고 청백함을 숭상하도록 힘쓰라. 재능이 없더라도 청백한 사람이면 발탁해 기용하여 일세(一世)를 인도하게 해야 한다.”
하였는데, 신하들을 계칙(戒飭)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윤대(輪對)를 할 적에는 각 사의 폐단을 하문하였고 전강(殿講)을 할 적에는 문신과 사자(士子)들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어제(御題)를 내어 옥당(玉堂) · 은대(銀臺) · 춘방(春坊) 등에서 입직한 관원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우수한 사람은 상을 주었다. 또 특별히 사신(詞臣)을 선발하여 사가독서하게 하였는데 글을 읽기도 하고 짓기도 하게 했다. 간간이 춘당대에 나아가 직접 문무(文武)의 재능을 시험하였는데, 간혹 당일 방방(放榜)하기도 하고 면대하여 상물(賞物)을 지급하기도 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동(聳動)시켰다. 대사성을 잘 가리고 또 좨주(祭酒)를 설치하되 유현(儒賢)에게 이를 겸대하게 하여 <소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효종대왕 - 시대상 (4)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1655년(효종 6) 칠석(七夕)에 제생(諸生)들을 모아놓고 제술 시험을 보였는데 곧이어 새로 만든 은배(銀杯)를 태학에 하사하였고 인하여 관중(館中)의 많은 관원들과 입격(入格)된 제생들에게 술을 내려주었다. 또 임금의 서한을 내리기를,
“구전(舊典)을 계속하기 위해 은배 2부(部)를 특별히 본관(本館)에 하사한다. 그것이 사치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보존되기 바라서이고 술을 마시기 위한 때문이 아니라 화협하기를 바라서이다. 그대 사생(師生)들은 이 뜻을 밝게 드러내어 삼가 공경하여 어긋남이 없게 하기 바란다.”
했는데, 이는 일세(一世)를 흥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미담(美談)이 되고 있다.

 노인을 우대하는 의리는 상례를 뛰어넘어 위로 조신(朝臣)에서부터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壽)한 것으로 벼슬에 오른 사람이 전후 매우 많았다. 나이가 많아 80세에 이른 사람은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해마다 존문(存問)하고 쌀과 술 등의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했으며 90세와 100세가 된 경우에는 자급을 뛰어넘어 제수하고 명주와 솜을 더 주고 호역(戶役)을 면제시켰다. 이는 여생이 많지 않으므로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100세가 넘은 서인(庶人)이 있으면 액정서(掖庭署)의 사람을 시켜 업어다가 전상(殿上)에 초치시키고 진수성찬을 먹였으며 철따라 생산되는 물건도 끊이지 않게 보내주었다.
 만수연(萬壽宴)이 있은 뒤 하교하기를,
“사경(四境) 안에 있는 나의 백성들의 부모로서 나이가 늙었는데도 잘 봉양받지 못하는 경우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이는 나의 책임이다. 중 외로 하여금 쌀 · 반찬 · 술을 하사하여 나의 추기급인(推己及人)하려는 뜻을 본받게 하라.”
하였다. 측은하게 여기는 전지(傳旨)에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효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활달한데다가 매우 명석하고 신중하였기 때문에 옥사(獄事)의 판결에 의혹이 없게 하였다. 1651년(효종 2) 겨울 역적 허견(許堅) · 김자점(金自點)의 옥사가 있을 때 왕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직접 국문했는데 역적의 아들 김식이 승복하면서 곧바로 함께 모의한 무장(武將)을 끌어들였고 계속해서 사대부를 고발하는 등 널리 파급되 었다. 왕이 문사낭관(問事郞官)을 시켜 다시는 동당(同黨)에 대해 묻지 말게 하니, 이에 의구심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김식이 말하기를,
“일찍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모사(謀事)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라고 운운했는데, 이 때 형장이 연경(燕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국청에서 이를 비밀에 부친 채 발설하지 않았다. 다음 해 3월에 형장이 의주(義州)에 도착했는데, 대신이 은밀히 청하여 급히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니, 온 조정이 그로 인하여 화란이 초래될까 우려하였다. 이는 적역(賊譯)이 정역(鄭譯)과 서로 표리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엄히 국문하여 거열형(車裂刑)에 처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처음에 김자점의 적소(謫所)인 광양(光陽)으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서를 수색하여 오게 했으므로 조사(朝士)들의 간찰(簡札)과 곤수 · 수령들의 서신이 모두 금중(禁中)으로 들어왔다. 그 내용에는 원망하는 말과 흉악스런 자취가 또한 환히 드러난 자도 있었지만 모두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뒤에 연신(筵臣)이 이에 대해 아뢰니 왕이 답하기를,
“볼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미 불태워 버렸다.”
하였다. 이는 옥사가 번질까 우려해서 였다. 대역(大逆)을 주참(誅斬)하고 나면 으레 하의(賀儀)가 있는 법인데, 왕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이 반역(反逆)을 하였으니, 부끄러울 뿐 축하해야 할 의의가 없다.”
하고, 드디어 받지 않았다.
효종대왕 - 시대상 (5)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서옥(庶獄)에 대해서도 삼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서전>의 전형(典刑)을 게시한다는 대문(大文)을 읽으면서 이르기를,
“ `어찌하여 후세에는 법망이 이리도 조밀하단 말인가\' 라고 한 것은 송 태왕(宋太王)의 말이 아닌가.”
하고, 여형편(呂刑篇)을 읽으면서는 또한 경신(敬愼)해야 한다는 뜻으로 형관(刑官)에게 면유(面諭)하고, 또 하교하기를,
“형벌은 정치를 보조하는 도구이다. 성인(聖人)도 부득이 쓰기는 했지만, 반드시 지공무사(至公無私)하여 한결같이 공평한 마음에 의하여 하였다. 그런 뒤에야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형을 받는 사람이 많은데도 실정을 자백하는 사람은 없으니, 정치를 보조한다는 의의가 너무도 없다. 간혹 1차의 형신을 받고 잇따라 치사(致死)되는 경우가 있으니 형벌을 가함에 있어 흠휼(欽恤)한다는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형조의 당상들이 아울러 주고받고 감죄(勘罪)되었다.

 매양 혹한기와 혹서기가 되면 승지를 보내어 전옥(典獄)을 점검하게 하여 먼저 죄가 가벼운 죄수는 방면시키게 하고 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즉각 소결(疎決)하게 하였다. 세시(歲時)에 임하여서도 이렇게 하였다. 외방의 감사가 혹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게 한 경우가 있으면 이미 지난 일이라는 것으로 다스리지 않은 적이 없이 반드시 나문(拿問)한 뒤에 죄주었다.

 1652년(효종 3) 겨울 교형(絞刑)에 처해야 될 죄인은 으레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는 말을 듣고 이에 하교하기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자못 율명(律名)의 본의가 못 된다. 내 가 매우 참혹하게 여기고 있으니 형관으로 하여금 살펴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로부터 응당 교형에 처할 사람은 목매어 죽였다. 형조가 이미 삼복(三覆)을 거치고 난 다음 죄인들을 율(律)에 의거해 처단하려 할 때,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따뜻한 기운이 봄 같고 장마비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어 있으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사수(死囚) 10여 명을 모두 오늘 복법(伏法)시키려고 하는데, 삼복의 의언(議쵌 : 죄정(罪情)을 의논함)을 거쳤어도 미진한 점이 있는가 우려스러워 다시 경들에게 묻고 싶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므로 다시 의언하였다. 그리하여 특별히 두 명에게 사형을 감해주었다.

 1654년(효종 5) 12월에 사관(史官)이 명을 받들고 전옥을 살핀 다음 서계하기를,
“죄수 가운데 8명은 의상(衣裳)이 홑옷이고 얇은 것이 더욱 극심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렇게 추운 계절에 나의 백성이 법금(法禁)에 저촉되어 추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옷도 몸을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불쌍하고 딱하게 여겨 회포를 가눌 수가 없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유의를 지어 주게 하고 또 땔감과 숯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또 모든 도에 유시하여 각 고을의 죄수들에게 땔감과 숯을 두루 지급하여 얼어 죽는 걱정을 면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이르기를,
“누차 형벌에 신중을 기하라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중외의 신료(臣僚) 들이 잘 봉행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곤수와 수령 등이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사죄(死罪)가 아닌데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 것이기 때문에 사죄를 범했더라도 오히려 재복(再覆) · 삼복(三覆)을 거쳐 의논하면서 차마 갑자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한때의 노여움 때문에 지나 치게 써서는 안 될 형장을 가하여 사람을 죽게 만드니, 국법으로 볼 때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의당 팔도의 곤수 이하 여러 장령(將領)들과 수령들에게 하유를 전하여 멋대로 형장을 쓰지 말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흠휼(欽恤)하는 뜻을 알게 하라.?br>?하였다.
효종대왕 - 시대상 (6)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1657년(효종 8) 겨울 당진(唐津) 사람 이정(李珽)의 무고(誣告)가 있었을 적에 설한(雪寒)이 바야흐로 혹독했었는데 호우(湖右)의 사민(士民)으로서 체포된 사람 가운데 춥고 배고픈 백성들이 많았었다. 왕은 공사(供辭)를 한 번 보고는 곡직을 환히 분변하여 고발한 자를 주참하고 무고당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으며 유사로 하여금 추위에 떠는 사람은 옷을 입혀 주게 하고 사람마다 모두 가면서 먹을 양식을 지급해 주게 하니,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며 감축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전후의 무옥(誣獄)을 모두 즉시 통쾌하게 결단하여 연루되어 억울함을 당하는 걱정이 없게 하였다.

 누차 변란을 겪어 사율(師律)이 실추되어 문란해졌으므로 인조조(仁祖朝)에 영장(營將)을 설립했었으나 곧 파하고 행하지 않았었다. 왕은 선조(先朝)의 옛 제도를 다시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이에 양호(兩湖)의 오영(五營)과 영남 좌우도의 모든 진(鎭)에 각각 영장을 설치하여 관할 내의 군졸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일이 있기 전에 대비하는 것을 전일하게 하였다.
 훈국(訓局)의 무장(武將)과 포병(砲兵)도 전에 비해 액수를 증가시켰고, 어영(御營)의 군졸도 부오(部伍)를 나누어 교대로 상번하게 하여 각기 조리가 있게 되었으며, 삼남(三南)의 편오(編伍)에게도 복호(復戶)해 주게 하였다.

 각시(各寺) 노비에 대해 추쇄(推刷)를 행하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도망하거나 물고(物故)된 허실을 전연 분별할 수 없어 그저 빈 장부만 걸어두고 있을 뿐이어서 누락되어 빠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은 고헐(苦歇)이 고르지 않으면 법령을 의거할 데가 없게 된다는 이유로 1655년(효종 6)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추쇄하였다. 그리고 어사(御史)를 보내어 조 사했는데, 양민(良民)이 되어 있는 경우는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세월이 오래되었으면 죄명을 씻어 주었으며, 원통한 사람이 진소(陳訴)하면 상세히 살펴서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한 호(戶)에 정(丁)이 많은 경우에는 헤아려 감하여 주고 쌀이나 베 등 그곳의 토의(土宜)에 따라 받아들이게 하였다. 남중(南中)은 받아서 각 주에 유치하여 두고 군수에 지급하여 쓰게 하였으며, 서로(西路)는 받아서 경용(經用)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의 급선무는 근본을 힘쓰는 것이므로 늘 하교하기를,
“과거에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에 농사짓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관개(灌漑)에 쓰이는 것으로는 수차(水車)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전연 이 제도를 모르고 있다. 그 제도를 이제 조당(朝堂)에 내리니 편리 여부를 살펴 외방에 전포(傳布)시킴으로써 농사 를 권면하는 데 일조가 되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한인(漢人)의 제도였다. 공주목사 신속 이 농서를 편찬하여 판각한 다음 인쇄하여 진상하니,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고 상을 주었다. 그리고는 해조에 명하여 많이 인쇄하여 널리 유포시키게 하였다.
효종대왕 - 시대상 (7)
제 17대조   이름(한글):효종대왕   이름(한자):孝宗大王

 민폐의 제거에 힘썼고 매번 능(陵)을 살필 때가 되면 더욱 부지런히 돌보아 유념하였다. 1650년(효종 원년) 가을 장릉(長陵)에 행행하려 하면서 하교하기를,
“산릉에 배알하지 못한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어 상로(霜露)의 감회를 가눌 수가 없다. 따라서 이번의 행행이 있게 되었으나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피로한 상황인데, 더구나 삼사(三使)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 하면 또 중국 사신이 나온다는 선성(先聲)이 있다. 내가 걸어서 갔다 올 수는 없겠지만, 민력을 수고롭게 하고 민재를 허비해 가면서 도로와 교량을 닦고 만들게 할 수 있겠는가. 해읍의 수령은 대가(大駕)를 인도(引導)하지 말고 감사는 거느리는 사람을 간략하게 하여 양식을 싸가지고 가게 하라. 이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으로 제재를 가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 이하에게도 스스로 마른 양식을 가지고 가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치지 못하게 하였다. 대가가 신원(新院)에 이르렀을 때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종신들이 머물러 있는 곳을 살펴보게 했는데, 각 고을의 인리(人吏)를 부리고 공궤(供饋)를 받는 사람도 있었고, 시위하는 군병들이 전지를 밟고 다녀 곡식을 손상시킨 경우도 있었다. 가까운 능에 행행할 때에는 대주정(大晝停) · 소주정(小晝停)을 진설하지 말고 한 곳에만 진설하도록 명하였다.

 백성들의 굶주림과 전염병을 구휼할 적에는 타는 불을 끄는 것같이 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북도(北道)에서 전염병을 앓아 사망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랐다고 치계(馳啓)하니, 납제(臘劑) · 청소(淸蘇) 및 각종 좋은 약재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온 도내에 흉년이 들었는데 육진(六鎭)이 더욱 극심하다고 아뢰니, 이에 영동(嶺東)의 곡식을 옮 겨 가게 하라고 명하였으므로 배로 운송하는 역사(役事)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부역을 크게 줄였고 내수사에 공납하는 물품도 모두 견감시켰으므로 굶주려 죽은 백성이 없었다. 1650년에 여항(閭巷)에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자 동서의 활인서에 엄히 계칙하여 마음을 다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며, 관에서 미곡을 지급하여 먹이는 한편 의사(醫司)로 하여금 이성구고환(二聖救苦丸)을 많이 제조하여 요절하는 것을 구제하게 하였다. 양서(兩西)와 기전(畿甸)에 참역(站役)이 편중되었기 때문에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삼로 (三路)의 참 가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진구하게 하고 관에서 요미(料米)를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내수사의 미포(米布) · 피물(皮物)과 그에 소속된 염분을 호부에 내주어 백성의 세금을 가볍게 해 주었다. 내국(內局)의 부용향(赴蓉香)은 국휼(國恤)이 있을 때까지 쓰지 말게 하였으며, 또 내공(內供)하는 술을 감하여 5일에 한 병씩만 바치게 하고 구급에만 쓰게 하였다. 이 때 우황(牛黃)의 값이 날개 돋친 듯이 치솟았으므로 이를 공납하는 고을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의 제조의 계달을 인하여 우황 · 웅담은 아울러 그 숫자를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인삼도 임시로 감하게 하였는데, 상 · 중 · 하 3품을 정하여 상품은 따로 한 상자를 담아서 어약(御藥)으로 공급하게 하고 중품은 사여(賜與)하는 데 쓰게 하고 하품은 원중(院中)에서 구급을 요할 때 쓰게 하였기 때문에, 도로 물리는 경우가 아주 적어 외방에서 크게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방물(方物)의 진헌도 2년까지 받지 않게 하였다.

 1651년(효종 2) 세자의 가례(嘉禮)를 행할 적에는 회례연(會禮宴)을 중지하게 하였으며, 드디어 내명부(內命婦) · 외명부(外命婦)의 상(床)에 진설하는 꽃송이 1백여 가지를 감하게 했으며, 다른 것도 비용을 감한 것이 매우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