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지돈(智敦) 1814∼1887    파명:진남군(鎭南君)
  진남군의 15대손이며 동몽교관 휘문(輝文)의 차남이다.
 가의대부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어 이로써 2대가 추증되었다.
치신(治藎) 1646∼1704    파명:진남군(鎭南君)
   초휘(初諱)는 진(震), 자는 장유(長儒), 호는 송암(松菴). 진남군의 9대손으로 통정대부 좌부승지 겸 경연춘추관 수찬관 정(靖)의 장남이다.
 교리(校理)를 거쳐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배수 재임 중, 1689년(숙종 15) 기사사화 때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영천에 상봉하솔 남하하여 은거하였다.
탁(倬) 1578∼1651    파명:진남군(鎭南君)
  진남군의 7대손이며 첨지중추부사 몽량(夢良)의 차남이다.
 통훈대부 남양도호부사를 배수하였다.
하장(夏章) 1707∼1792    파명:진남군(鎭南君)
  자는 여정(汝正), 진남군의 11대손이며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세진(世震)의 장남이다.
 1786년(정조 10) 가선대부 행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되어 이로써 3대가 추증되었다.
헌국(憲國) 1525∼1602    파명:진남군(鎭南君)
  자는 흠재(欽哉), 호는 유곡(柳谷), 시호는 충익(忠翼). 진남군의 현손이며 증조는 정의대부 이조참판 진례군이고, 조부는 증 소덕대부 황산군이며 아버지는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수창군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온양정씨로 교리 초(礎)의 딸과 정경부인 삭녕최씨로 영의정 흥원(興源)의 딸이다.
 외조부 정광필(鄭光弼)은 매양 먹다가 남은 밥은 손자 유길(惟吉)과 증손 지연(芝衍)에게 먹도록 하였다. 공이 어려서 외가에 왕래할 때 정광필이 공을 눈여겨 보더니 하녀를 불러 공에게도 남은 밥을 먹이도록 하였다. 이에 하녀가 물러가 서로 눈웃음치며 “저분도 또 나라의 재상이 될 것인가?” 하였다 한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경서에 통달하여 1551년(명종 6) 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1590년(선조 23) 추충분의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에 책훈되었다. 또한 성품이 강직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대사헌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대왕과 세자를 모시고 난을 피할 때 직언을 하였다. 이에 선조대왕은 너그럽게 용납하여 “그대는 교목(喬木)의 세신(世臣)으로 이 무질서한 때를 당하여 간쟁함으로써 충성된 바람이 있으니 내 어찌 의리를 져버릴 것인가!” 하였다고 한다.
 철옹산성(鐵瓮山城)에 당도했을 때 임금께 올릴 수라상을 마련치 못하고 있자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소리치기를 “여기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소인이다. 어찌 보리밥과 콩죽도 주선하려는 사람조차 없느냐.” 하니 곧 근읍의 수령들이 계속해서 식사를 제공하였다.
 그 해 6월 왜적이 서울을 핍박해 오자 선조대왕은 제신들과 서쪽으로 파천하려고 할 때 대사간으로서 호종하여 임진나루에 다다랐다. 폭우가 쏟아지고 때는 그믐밤이라 지척을 가리지 못하니 일행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방황할 때 언덕 위에 이율곡의 화석정이 있으므로 공이 이르기를 “위급한 이 난국에 어찌 옛날의 어진 이의 하나의 정자를 아낄 것인가.” 하면서 정자에 불을 지르라 호통하니 불빛은 강위를 비추어 대낮같이 밝은지라 그리하여 왕의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너 갔었다.
 1594년(선조 27) 이조판서가 되고 1599년(선조 32) 신병으로 이조판서의 직책을 수행키 어려워 3차에 걸쳐 사양하였던 바 선조대왕은 “이조판서를 사양하는 자는 처음 보았다. 정승할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그 해 좌의정으로 임명했었다. 임금님을 모시고 의주로 파천하여 1593년(선조 26) 환도할 때까지 호종한 공로가 인정되어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에 책훈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602년(선조 35)에 돌아가니 `충익(忠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충근정량(忠勤貞亮) 호성갈충진성(扈聖竭忠盡誠) 동덕찬모(同德贊謨) 위성공신(衛聖功臣)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 겸 영경연(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완성부원군으로 증직되었다.
현충(顯忠) 1506∼1570    파명:진남군(鎭南君)
  자는 중공(仲貢), 호는 수헌(修軒), 시호는 정헌(靖憲). 진남군의 현손이며 증조는 정의대부 봉성군, 조부는 명선대부 부안정, 아버지는 선휘대부 익흥수 형조참판 효원(孝源)이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로 이참 원(源)의 딸이다.
 공은 3세에 어버이를 잃고 학업에 전념하여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1533년(중종 28) 별시 갑과에 등과하여 한림 · 호조좌랑 · 이호조정랑을 제수받았으며 명종 때에 홍주목사를 지내고 가선대부 이조참판 · 예문관제학 · 동지경연 춘추관사에 제수되었다.
효돈(孝敦) 1857∼1917    파명:진남군(鎭南君)
  자는 달회(達會), 호는 호은(湖隱). 진남군의 15대손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휘종(輝宗)의 차남이다.
 통정대부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배수하였다.
휘종(輝宗) 1828∼1909    파명:진남군(鎭南君)
  초휘는 인묵(仁默), 진남군의 14대손이며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경운(慶運)의 장남이다.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로써 3대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