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대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태린(兌麟) 1671∼1694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영원부수의 장남으로 자는 덕여(德汝).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묘소는 대월면 인곡 유좌이다.
 배위는 동래정씨 석주(錫周)의 딸로 묘소는 합폄했다.
필경(必慶) 1675∼1744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안평수의 손자로 자는 선보(善甫), 호는 경재(景齋).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묘소는 시흥군 군자면 월곳리 통수안 선영하 진좌이다.
 배위는 청주한씨 운희(運熙)의 딸로 묘소는 동영이다.
필한(弼漢) 1612∼1677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밀산군의 차남으로 사과(司果)와 용양위 부호군의 벼슬을 지냈다. 향년 66세로 별세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포곡면 금어리 어매곡 오좌이다.
 배위는 장령(掌令) 현풍곽씨 천호(天豪)의 딸로 묘소는 합폄했다.
하술(河述) 1701∼1777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자는 효백(孝伯). 대원군의 5대손이며 금평군의 장손으로 덕소(德紹)의 아들이다. 생부는 흥소(興紹). 1729년(영조 5) 식년시 을과에 급제, 부사 참판을 지냈다. 효행으로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능성구씨 문철(文澈)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군 진동면 동자원 술좌이다.
하영(夏榮) 1655∼1719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양산수의 손자로 자는 사영(士永). 가선대부 돈녕부도정을 지냈다. 향년 65세로 별세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용강리 전록 건좌이다.
 배위는 감역 함양여씨 지길(趾吉)의 딸과 첨지 봉화정씨 대립(大立)의 딸로 묘는 3합폄했다.
하전(夏銓) 1842∼1862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자는 치홍(致弘). 대원군의 13대손이며 완창군(完昌君) 시인(時仁)의 아들이다. 1849년(헌종 15) 헌종대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왕족 중 기개 있는 인물로서 왕위계승권자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외척인 안동김씨들의 반대로 철종대왕이 즉위하게 되면서부터 안동김씨들의 감시와 미움을 받았다. 돈녕부도정 등을 지냈고, 1862년(철종 13) 김순성(金順性) · 이긍선(李兢善) 등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모반하였다는 오위장 이재두(李載斗)의 무고로 제주도에 유배, 사사되었다. 고종황제가 1864년(고종 1)에 즉위하여 신원되고, 1902년(광무 6) 숭정대부 경원군(慶原君)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달성서씨 음순(音淳)의 딸이다.
 묘소는 수락산 국내 건좌이다.
해창(海昌) 1865∼1945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자는 배언(拜言). 세정의 8대손이고 하전(夏銓)의 아들이며 생부는 경용(慶鎔)이다. 음사(蔭仕)로 참봉을 지내다가 1889년(고종 26) 문과 병과에 급제, 승지를 거쳐 봉상사(奉常司)의 장을 지내고 숭정대부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수락산 국내에 있다.
형규(亨逵) 1733∼1789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자는 중우(仲羽). 대원군의 8대손이며 1755년(영조 31) 을해토역정시(乙亥討逆庭試) 병과에 급제, 한림(翰林) · 동벽(東壁) · 사인(舍人) · 검상(檢詳) · 경기도 관찰사 ·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형원(亨元) 1739∼1798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자는 선경(善卿). 대원군의 8대손이다. 1761년(영조 37) 합삼경정시(合三慶庭試) 병과에 급제, 승지 · 감사 · 호조참판을 지냈다. 정조 때 장수의 추천으로 선전관 수사(水使)를 지내기도 한 문무 겸전한 명관이었다.
홍술(弘述) 1647∼1722    파명: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자는 사선(士善). 대원군의 5대손으로 응천군 돈(쪇)의 손자이며 석한(錫漢)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무신. 1674년(현종 15) 무과에 급제,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 청나라에서 심양성(瀋陽城)을 증축하니 조선에서도 평안도 방면의 군비를 충실히 할 것을 청하였다. 벼슬이 포도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숙종대왕이 승하하였을 때 김일경(金一鏡) 등이 환관 궁녀들과 결탁하여 집권하려 했으나 그의 호위(扈衛)가 삼엄하여 간신배들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경종대왕이 즉위하였으나 아들이 없자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건저(建儲)하기를 거듭 청하여 연잉군(延휰君 : 후에 영조대왕)을 왕세자로 삼아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 공이 컸다. 1720년(숙종 46) 포도대장으로 있으면서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태장을 쳐 죽인 일이 있었는데, 육현이 김창집의 음모사실을 알기 때문에 김창집이 그를 시켜 죽이게 하였다고 김일경 등이 조작하여 옥사를 일으켰으며, 또한 1722년(경종 2) 다시 목호룡(睦虎龍)이 경종대왕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에 관련되어 하옥되었다. 김일경이 본래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직접 가혹하게 심문하였으나 끝까지 불복하다가 별세하였다. 그 후 가산이 적몰되고 가옥은 목호룡에게 상급으로 나갔다. 1741년(영조 17) 관작이 복직되고 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배위는 광산김씨 정석(廷錫)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 사기막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