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정서(鼎?) 1788∼1861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사돈(士惇), 영성군의 6대손이며 기헌의 3남이다.
 1826년(순조 26)에 전강시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說書)를 지냈고,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묘소는 영성군 선영 묘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해평윤씨이다.
정신(鼎臣) 1792∼1851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성린(聖隣), 시호는 효헌(孝憲), 요헌의 아들이다. 충주목사,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조참판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 정헌대부 공조판서에 올랐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자곡면 어은동 건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해평윤씨이다.
정준(鼎俊) 1786∼1862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사극(士克), 영성군의 6대손이며 기헌(基憲)의 아들이다.
 1828년(순조 28) 생원시에 합격하여 통정대부 첨중추부사에 올랐다.
 묘소는 영성군 선영 임좌이다.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주헌(周憲) 1750∼1813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자문(子文)이고 해흥군의 손자이다.
 황주목사를 지냈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어의동 미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이다.
준영(俊永) 1816∼ ?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기오(箕五), 영성군의 7대손으로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이다.
헌영( 永) 1837~1907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경도(景度), 호는 경와(敬窩) · 동련(東蓮). 영성군의 7대손이며 정태(鼎台)의 아들이다. 1867년(고종 4) 진사, 187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특제되었다. 그 뒤 1877년에 병조참지, 1878년 경기도 암행어사를 역임하였다. 1881년 1월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는데, 수행원으로 이필영(李弼永) · 민건호(閔建鎬) · 임기홍(林基弘) 등이 통사로 동행하였다. 이 때 그가 시찰한 부서는 세관관계 기구였고, 이 시찰로 인하여 개화파 관료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귀국한 다음 새로운 중앙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부경리사(副經理事)로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에는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고, 1883년에는 경상우도 암행어사 · 이조참의를 거쳐 부호군으로 감리부산항통상사무(監理釜山港通商事務)에 임명되었다.
 1884년에는 의주부윤, 1886년에는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로 일본주차판사대신(日本駐箚辦事大臣)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에는 동지춘추관사, 1887년에는 병조참판 · 한성부좌윤, 1889년에는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890년에는 이조참판 ·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 성균관 대사성 · 공조참판 · 병조참판 · 경상도관찰사, 1893년 한성부좌윤 · 형조참판, 1894년에는 지춘추관사 · 한성부판윤 · 공조판서 · 형조판서 · 충청도관찰사, 1895년에는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내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6월 지방제도 개편 이후 평안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고, 1897년에는 봉상시제조(奉常寺提調), 1898년에는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 의정부참정, 1899년에는 장례원경(掌禮院卿) · 궁내부특진관, 1900년에는 시종원경(侍從院卿), 1902년에는 경상북도관찰사, 1904년에는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편찬서로는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 <일본문견별단초(日本聞見別單草)> · <일본세관시찰기(日本稅關視察記)> · <조선국수출입반년표(朝鮮國輸出入半年表)> · <나가사키세관규식초(長崎稅關規式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이패동에 있다.
 배위는 정부인 청송심씨와 정부인 여흥민씨이다.
현영(顯永) 1812∼1884    파명:영성군(寧城君)
  자는 공담(公聃), 영성군의 7대손이다.
 장릉참봉, 예천군수, 안동진관, 평강군수, 옥과현감을 지냈고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묘소는 천안시 옥천에 있다가 수신면 지압동으로 이장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