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삼석(三碩) 1656∼1709    파명:양원군(楊原君)
  삼석(三碩) [1656(효종 7)∼1709(숙종 35)]
 자는 달부(達夫), 양원군의 5대손이며 통훈대부 동복현감 창(昌)의 아들이다. 모친은 정부인 덕수이씨로 사헌부 지평 무(武)의 딸이다. 1656년(효종 7) 11월 26일에 태어나 1709년(숙종 35) 7월 20일 향년 54세로 별세하였다. 문예가 일찍 이루어져 9세에 조어시를 지었다. 성균관이 주관하는 시험에 열두 번 치러 과거시험장에서 명성이 있었고 여러차례 장원하였다. 일찍이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여 승문원에 선발되고 정자를 거쳐 관례대로 저작박사로 승진 춘추관 · 승정원 주사 · 사간원 정언을 거쳐 전라 관찰사로 암행어사에 선발되었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휘원(輝遠) · 차남 희원(希遠)이고, 딸은 생원 황욱(黃昱)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산98번지 해좌에 예장하였다.
섬(暹) 1612∼1673    파명:양원군(楊原君)
  섬(暹) [1612 (광해군 4)∼1673(현종 14)]
 자는 퇴숙(退淑), 양원군의 증손인 여원도정의 차남으로 1612년(광해군 4) 4월 17일에 태어나 1673년(현종 14) 4월 20일 향년 62세로 별세하였다.
 형인 목사공 정(晸)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모두 진사로 광릉참봉을 제수받고 승진하여 전옥봉사 · 사직참봉 · 내자시 주부를 거쳐 산릉도감 조관이 되었다. 후에 서원현감에 제수되어 병영을 이설할 때 목사로 승진되고 은혜로운 정치를 많이 베풀었다.
 1671년(현종 12) 필선에 제수되었다가 간성군수를 거쳐 홍주목사가 되어 읍의 치소에 공의 선정비가 있었다.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기석(箕碩) · 차남 문석(文碩) · 3남 만석(晩碩) · 4남 가석(家碩)이며 장녀는 장수황씨 성(晟)에게 출가, 차녀는 한산이씨 수필(秀弼)에게, 3녀는 한산이씨 명항(明恒)에게 출가하였다.

 
성석(聖碩) 1647∼1686    파명:양원군(楊原君)
  성석(聖碩) [1647(인조 25)∼1686(숙종 12)]
 양원군의 5대손으로 양촌거사라 하였다. 증조는 여원도정 세헌이다. 모친은 밀양변씨로 참판 삼근(三近)의 딸이다. 공은 1647년(인조 25) 4월 29일에 태어나 1686년(숙종 12) 4월 21일 향년 40세로 별세하였다. 어려서부터 우암(尤庵)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1674년(현종 15) 갑인사화가 일어나 동문의 여러 벗들과 함께 세번의 상소를 올렸다.
 우암선생이 마침내 영해에 가시울타리를 쳐 유배된 것을 원통히 여겨 공은 전야에서 두문불출하며 세상일을 사절하고 오직 성리학에만 힘썼으며 공은 후에 신(晨)의 후사가 되었다.
 세상은 그의 행실의 아름다움을 높이 여겼고 일찍 별세하여 그 뜻을 다하지 못한 것을 불행히 여겨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묘소는 녹양동 선영아래 계좌에 예장하였다. 장남 흥원(興遠)과 차남 도원(度遠), 장녀는 남세중(南世重)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신옥(申沃), 3녀는 한배한(韓配漢)에게 출가했다.
세복(世馥) 1609∼1685    파명:양원군(楊原君)
  세복(世馥) [1609(광해군 1)∼1685(숙종 11)]
 자는 여방(汝芳), 양원군의 손 봉릉도정(鳳陵都正) 철수(鐵壽)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군 1) 11월 11일에 태어나 1685년(숙종 11) 5월 6일에 별세하였다.
 광해군 때에 화를 피하여 부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낙향한 후 봉산 초구에 살면서 경서에 전심하였으나 과거는 보지 않았다. 정묘호란에 형인 형(馨)이 가솔를 잃어서 종친부에 건의하여 왕의 윤허를 얻어 호조참판으로 증직하였으며 선조의 제사를 받들었다. 묘소는 봉산 누동 망일 유좌 언덕에 있다. 정부인 경주최씨는 주부 걸(乞)의 딸로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화(華)와 시진(時振), 시준(時俊), 시주(時胄)이며 딸은 여흥민씨 여구(汝求)와 우순신(禹舜臣)에게 출가했다.
신(晨) 1615∼1678    파명:양원군(楊原君)
 신(晨) [1615(광해군 7)∼1678(숙종 4)]
 자는 명숙(明淑), 양원군의 4대손으로 여원도정 세헌(世憲)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에 태어나 1678년(숙종 4)9월 26일 별세하였다. 공은 총명하고 온아하였으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글로써 과장에서 명성을 날렸고 1648년(인조 2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52년(효종 3) 의금부 도사에 제수 되었다.
 여원도정이 별세하자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병환이 났다. 의정부시 녹양동 뒷산 기슭에 예장하였다.
 공은 후사가 없어 아우인 창(昌)의 아들인 성석(聖碩)을 후사로 맞이하여 해평윤씨 박(博)의 딸과 혼인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윤겸(允謙) 1761∼1821    파명:양원군(楊原君)
  윤겸(允謙) [1761(영조 37)∼1821(순조 21)]
 자는 성익(聖益), 양원군의 9대손으로 1761년(영조 37) 11월 1일에 태어나 향년 61세로 1821년(순조 21) 8월 27일에 별세하였다. 모친은 전주최씨로 통덕랑 홍우(弘佑)의 딸이다. 1790년(정조 14)에 병과에 급제하여 연이어 생원시에 급제한 몇 명에 포함되었다. 그 후 승정원 주서를 제수받고 봉사 · 시판관 · 홍문관 교리 · 사간원을 거쳐 무장현감에 제수되고 성균관 사성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한양조씨로 통덕랑 윤원(胤源)의 딸이다. 효심이 지극하여 순조대왕이 효부의 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1남 준영(俊英)은 조상의 음덕으로 공조참판의 관직에 임명되고 딸은 부사 정기묵(鄭基默)에게 출가했다. 다른 배위에서 1남 1녀를 두었으니 1남은 민영(敏英), 딸은 군수 조의상(趙義象)에게 출가했다. 준영은 정랑 박기원(朴基原)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니 1남은 병일(炳一), 2남은 병달(炳達), 3남은 병유이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어둔리 후곡 술좌에 예장하였다.
윤억(允檍) 1800∼1857    파명:양원군(楊原君)
 윤억(允檍) [1800(정조 24)∼1857(철종 8)]
 자는 희수(希壽), 행도(行道)의 아들이다. 1800년(정조 24) 2월 14일 태어나 1857년(철종 8) 6월 30일에 별세하였다. 1839년(헌종 5) 생원일 때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어 임금을 알현하였다. 배위는 진사 남양홍씨 응서(應舒)의 딸이며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인 인영(麟英)은 진사가 되었고 딸은 한양조씨 석규(錫奎)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황해도 봉산 개야동에 있다.
윤행(允行) 1762∼1817    파명:양원군(楊原君)
  윤행(允行) [1762(영조 38)∼1817(순조 17)]
 자는 성유(聖攸), 호는 주천곡(酒川谷). 통덕랑 흥주(興周)의 아들로 1762년(영조 38) 5월 4일에 태어나 1817년(순조 17) 3월 3일에 별세했다.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고 외직으로 부안현감을 지냈다. 도백 서정수(徐鼎修)가 조근하였을 때 직무를 태만히 한다하여 파직시켰으나 특별히 임금이 교지를 내려 계속 그 직책을 맡게하고 그 도의 안렴사를 겸직케 하였다. 시집 4권이 남아있다. 배위는 숙인 청주한씨로 정시(靖蓍)의 딸이며 2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만영(晩英)이고 차남은 모영(謨英)이다. 장녀는 평산신씨 억(檍)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반남박씨 종순(宗絢)에게, 막내는 창원황씨 종(鍾)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선영 자좌에 있다.
인제(仁齊) 1737∼1798    파명:양원군(楊原君)
 인제(仁齊) [1737(영조 13)∼1798(정조 22)]
 자는 겸오(兼五), 호는 담재(淡齋). 양원군의 4세손 해천군의 아들인 준방(峻芳)의 증손이다. 1737년(영조 13) 9월 8일 생이며 1798년(정조 22) 3월 29일에 별세하였다. 당시에 문명이 있었으나 은거하면서 독행하고 문달을 구하지 않았다. 배위는 무송윤씨 봉양(鳳陽)의 딸로 슬하에 동규(東奎) 1남을 두었다. 묘소는 평창군 묘하 유좌에 있다.
정(晸) 1610)∼1682    파명:양원군(楊原君)
 정(晸) [1610(광해군 2)∼1682(숙종 8)]
 자는 인숙(寅淑), 양원군의 증손인 여원도정의 장남이다.
 1610년(광해군 2) 9월 18일에 태어나 1682년(숙종 8) 12월 15일에 향년 73세로 명례동 댁에서 별세하였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수려하고 강직하였으며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 여러 관직을 역임, 원주목사에 부임되었다. 배위는 무안박씨로 군수 응선(應善)의 딸이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계좌에 예장하였다. 후사가 없어서 섬(暹)의 차남 문석(文碩)을 양자로 맞이하여 감사 딸과 혼인, 3남 1녀를 두었다. 3남은 홍(?)과 제(?), 경원(慶遠)이다.
 1녀는 지사 신준(申晙)에게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