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의충(宜忠) 1576∼1632    파명:덕원군(德源君)
 의충(宜忠) [1576(선조 9)∼1632(인조 10)]
 자는 성부(誠夫), 덕원군의 현손이며 증조는 기성도정이고 조부는 완천령이다. 연성령 인경(仁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로 선비 춘화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등과하여 선전관이 되었다가 도총부 도사로 진급, 훈련관 판관 · 해남현감을 거쳐 다시 도총이 되었다가 어모장군이 되었으며 1632년(인조 10) 6월 10일 57세로 별세하였다. 공은 평생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으며 해남에 부임하여서는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려 읍민이 비를 세워 이임한 뒤에 공을 기리도록 하였으나 공(功)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안타깝다. 비문은 강원도 관찰사 한충희가 썼다.
정근(正根) 1856∼1919    파명:덕원군(德源君)
  정근(正根) [1856(철종 7)∼1919]
 자는 경직(敬直), 호는 탄운(灘雲). 덕원군의 14대손이다.
 30세에 구한말 정부 궁내부 주사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여생을 조국 광복에 바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낙향하였다. 1919년 3월 20일경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전달되자 독립운동을 본격화할 때라고 판단하고, 동지와 수천의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며 결사적인 시가행진을 독려하고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주재소에 이르러 총칼을 휘두르는 일본헌병들과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공을 노리던 헌병대장의 총검에 복부를 무참히 난자당하였다. 공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솟아 나오는 피를 헌병대장의 얼굴에 뿌리며 최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63세를 일기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묘소는 대전시 유성구 갑동 국립묘지 제2애국지사 묘역 234호이고, 위령제를 지내는 3 · 1운동의 선구자 탄운(灘雲) 리정근(李正根) 의사(義士) 창의탑(彰義塔)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발안에 있다.
 
철증(哲曾) 1747∼1792    파명:덕원군(德源君)
  철증(哲曾) [1747(영조 23)∼1792(정조 16)]
 자는 원명(原明), 덕원군의 9대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어 누구나 친하였다.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인 김해김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에 있다.
택(澤) 1583∼1653    파명:덕원군(德源君)
  택(澤) [1583(선조 16)∼1653(효종 4)]
 자는 태이(兌而), 덕원군의 4대손이며 1613년(광해군 5) 양지현감을 지냈다.
 초당(草堂) 영회(詠懷) · 조령(鳥嶺) 영회(詠懷) · 피저(被캛) 영회(詠懷) 등의 시가 있다. 70세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청룡동 산 52-2 임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