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정양군(定陽君) 1442∼1492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대군의 3남으로 휘는 순(淳), 자는 비숙(卑叔)이다. 모친 제안부부인 최씨는 증 우의정 승녕(承寧)의 딸이다. 세조 · 예종 · 성종의 3조를 섬겼다. 일찍이 공은 종친부와 내수사 사옹원의 도제조를 맡아 정1품 흥록대부를 받았다.
 공이 병이 들었을 때 성종대왕은 의사와 약을 하사하였으며 그 후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고 철시하였다. 또한 부의를 내리고 관부에 명하여 후하게 장사지내게 함으로써 남다른 은총을 보였다.
 배위는 풍천군부인(豊川郡夫人) 진주강씨 감사 자평(子平)의 딸이다. 여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진천군(晋川君) 1513∼1583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휘는 옥정(玉貞), 자는 백강(伯剛)이고 덕림군의 장남이다. 진양부정(晉陽副正)에 있다가 1544년(중종 39)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올라 진천군으로 봉해졌다. 공은 천성이 명민하고 처사가 정확하였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누구에게도 호감을 주었으며 또 겸손하고 근신하여 분수에 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라에 국상이 나면 3년 동안 혼전(魂殿)에서 윤번으로 번을 들었으며 전례에 따라 직품을 올려 주어 당연히 받아야 할 차례에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젊었을 때 술을 좋아하니 아버지 덕림군은 건강을 염려하여 금주를 호소하자 그로부터 술을 끊고 평생토록 한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효심과 굳은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질이 하도 포악하고 비행이 잦은지라 한번은 불러다 심하게 꾸짖은 일이 있었다. 그는 앙심을 품고 진천군을 모함하고자 친구인 홍린(洪麟)을 사주하여 “진천군이 역모를 꾸며 왕이 되고자 한다.”고 고발하였다. 이의 진상을 밝히고자 여러 사람이 국문한 결과 무고임이 명백해지자 홍린은 무고죄로 사형을 받았다. 그러나 대간에서는 종실의 근친으로 있으면서 남의 입에 오르내린다 하여 1550년(명종 5) 삭탈관직을 당했으며 3년 후 복관되었다.
 향년 71세로 별세하니 부음을 들은 선조대왕은 장례를 예법대로 하고 관에서 상사를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배위는 남원현부인(南原顯夫人) 남원윤씨로 증 판서 남원군 형(衡)의 딸이다.
춘산군(春山君) 1540∼ ?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휘는 검(儉), 대군의 증손이며 해구군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부령이었으나 아들 상룡(祥龍)의 추은(推恩)으로 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하산도정(河山都正) 1552∼1592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휘는 익(翼), 자는 덕보(德輔)이며 오산도정의 아들이다. 공은 처음에 하산부수에 제수되었다. 천품이 고결하여 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다르고 기상이 엄연(儼然)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도정에 추증되고 임진록훈(壬辰錄勳)에 올랐다.
 은산령(殷山令) [1530(중종 25)∼ ? ]
 휘는 온(溫). 대군의 증손이며 해구군(海口君) 현손(賢孫)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홍산군(洪山君) 1553∼1608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휘는 득(得), 자는 신중(信中)이다. 대군의 증손이며 해구군의 아들이다. 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어 총명하였다. “대장부가 세상에서 어찌 한갖 문묵(文墨)만을 숭상하랴. 또한 마땅히 무예도 겸비해야 하니 승평한 시대에는 성명을 도와 다스림을 이루고 병란을 만나면 적을 무찔러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하며 여가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왜적이 침범하자 “신이 비록 재략이 없으나 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미약한 힘이라도 다하여서 국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까 하나이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임금은 크게 칭찬하고 부령에서 도정으로 승진시켜 신립(申砬)과 함께 가게 하였다.
 탄금대에서 관군이 크게 패하자 공은 겨우 피하여 곧장 대궐로 들어가 일의 시말을 갖추고 아뢰니 임금은 곧 순변사를 삼아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임진강을 막게 하였다. 추격하는 적의 장수를 목베고 풍덕의 화장포까지 진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에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길에 오르니 공이 이를 듣고 호종하기 위하여 곧장 의주로 들어가 머물렀다. 이듬해에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수성장이 되어 군진에 머물렀으며, 10월에 사복장으로 입직하여 다시 정의대부로 2품의 위계에 오르고 군에 봉해졌다. 1600년(선조 33) 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한음군(漢陰君) [1540(중종 35)∼1618(광해군 10)]
 휘는 현(俔), 자는 경연(磬然), 호는 교취당(交翠堂)이다. 대군의 증손이며 청화군(淸化君) 준손(俊孫)의 아들이다. 5세에 글을 지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며 자라면서 박학다식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1562년(명종 17)에 영(令)에서 정(正)으로, 1579년(선조 12) 도정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의 위급함을 근심하고 정치의 폐단을 논하였다. 임금이 도성을 떠날 때 호종하다가 행전을 찢어 글을 써서 아첨하는 자들을 목베고, 인심을 수습하여 종사의 근본을 굳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 해 겨울에 윤두수(尹斗壽)의 청으로 2품에 올라 군에 봉해졌다. 1597년(선조 30) 중국 사신 양호(楊鎬)가 우리 나라에 오게 되었는데, 양호는 글 잘하기로 이름났으므로 조정의 의논에 따라 문사에 능한 이를 가려 영접의 임무를 맡길 때 임금은 특별히 공에게 명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선원록> 교정당상이 되어 중의대부에 올랐다. 1618년(광해군 10) 간신이 인목대비를 폐출하기 위하여 조례를 했으나 공은 대의에 입각하여 참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삭출당했다. 이해 8월 6일에 향년 79세로 별세하였다. 인조반정 때 관작을 회복하여 정2품 승헌대부로 추증되었다. 유고 두 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