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선계 검색창

* 검색어는 한글이나 한자 모두 사용이 가능합니다.
* 검색어 예시: 광희, 自延, 양무(陽茂) , 15세 등 선계와 관련된 검색어를 입력하시면 됩니다.
* 검색어는 2자 이상에서 20자이내입니다.

총 25건의 자료가 존재합니다.

16세(世) 인(璘) (2)
제 16대조   이름(한글):인   이름(한자):璘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인공의 이름을 정량(貞亮 : 定良)으로,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부국태(父國太) 또는 부국대부(富國大夫) 염우(?祐)로, 기대극(奇大極)이 기대승(奇大升)으로, 기린산(麒麟山)이 향린산(香麟山) 또는 향인산(香因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인(璘) 공의 휘를 인(隣)으로도 보느냐가 문제이다. 이 동음이자(同音異字)가 우리 선원선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원계보>에는 용부(勇夫) 공의 아드님으로 인(璘)과 거(?) 형제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인(璘)을 인(隣)과 같이 볼 때는 준의(俊義)와 의방(義方) 두 형이 생기고, 매제[于學儒]가 더 늘어난다.

<고려사> · <태조실록> · <씨족원류>에는 인(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璘)과 인(隣) 을 같은 분으로 보는 이유는

<선원계보>에 `인(璘)공은 벼슬이 내시집주(內侍執奏)요, 배위 는 문극겸(文克謙)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고,

<고려사> · <문극겸열전(文克謙列傳)>에 “문극겸은 미혼의 딸이 있었는데, 리의방(李義方 : ?∼1174)의 아우 리린(李隣)에게 시집보 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 · <리의방열전(李義方列傳)>에 1174년(고려 명종 4) 1월에 중흥사(重興寺) 중 등 2천 명이 리의방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난 뒤, 리 준의(李俊義)와 리의방이 싸우므로 정중부(鄭仲夫 : ?∼1178)가 말하기를 “형제가 궁중에서 싸우다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며 리준의를 살해하려 하는 등의 기록으로 리준의와 리의 방이 한 형제임을 나타내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또, <고려사> · <우학유열전(于學儒列傳)>에는 “정중부의 난을 꾸밀 때 우학유 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성공한 후에 그를 죽이려 하니, 그는 겁 이 나서 리의방의 누이에게 장가 가서 무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준의 · 리의방 · 리린 · 우학유가 남매 지간이라는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설을 따르는 기록은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을 비롯하여 타성의 학자들도 그렇 게 주장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선원계보>에는 인(璘)공의 아우에 거(?)공만 아우로 기록되어 있으니 어째서일 까? <고려사> · <최균전(崔均傳)>에 이런 기사가 있다. “1174년(고려 명종 4) 9월에 서 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 · 리의방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때 화주(和州 : 永興)의 낭장(郞將) 리거(李?)가 성문을 열어 주어 정중부군이 퇴각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리거란 분이 과연 우리의 선조인 평장사공일까? 동명이인일까? 시대가 비슷한 것은 수긍이 가는데, 형제간에 행동이 다르니 의아하게 느껴진다. 리준의가 마지막에 리의방을 죽이려 한 일화나, 리의방을 죽이려 쳐들어온 조위총의 편을 들어 리거가 리의방 에게 불리하게 행동했다면 그것은 형제간의 의리상 부도덕한 것이다.

물론 형제간에도 뜻이 다르고 이해가 달라 해치려던 일은 동서고금에도 있는 일이나 준의 · 의방 · 인 · 거를 4형제로 볼 때 관계가 매우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으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16세(世) 인(璘) (3)
제 16대조   이름(한글):인   이름(한자):璘

이미 다 아는 대로 리의방은 정중부난 때 제2인자로, 총참모로 그의 지략에 의하여 그 일이 성공된 것이다. 혁명이 성공한 뒤 1174년(고려 명종 4) 3월 기축일에 그의 딸이 태자비(太子妃)가 되니 <고려사> <후비열전(后妃列傳)>에 “강종(康宗) 사평왕후(思平王后) 리씨는 의방의 딸로 강종이 태자였을 때 맞아들여 수령공주(壽寧公主)를 낳았는데 의방이 죽음을 당하자 쫓겨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리의방은 한때 제일의 권력자로 부원군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나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18일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보낸 중 종감(宗?)에게 피살되니 그 집안은 만고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1170년(고려 의종 24) 혁명을 일으킨 지 4년만의 일이었다.

리의방이 피살되자 정중부는 왕명을 빌어 형 준의와 동생 인 등 1백여 명을 참살했다고 김영곤(金英坤)이 지은 <고려왕비열전>에는 적고 있다. 이 때 태자비는 임신 8개월이라 의종 임금이 보류해 두었었는데 두 달 후에 딸을 낳고 이듬해 3월에 폐출해 버렸다.

그러니 인(璘)과 인(隣)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우리 선원선계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치 욕적인 면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분을 별개의 인물로 볼 때는 우리의 <선원계보>대로 단 순해지나, 요는 인(璘)공이 내시집주(內侍執奏) 벼슬이란 것과 문극겸의 딸을 아내로 맞으신 것이 똑같기 때문에 따로 떼어 생각하기도 어렵다.

내시집주란 왕명의 출납(出納)과 숙위(宿衛)의 임무를 띠고, 임금 곁에서 복무하는 조선조 때 승정원 내 관리같이 생각되는데, <고려사>에는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계해일에 리 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만약에 <고려사> ·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 등의 기록대로 인(璘)과 인 (隣)이 같은 분이라 가정하면 용부(勇夫) 공의 자녀는 4남 1녀가 되고, 1174년(고려 명종 4) 에 준의 · 의방 · 인 세 분이 동시에 작고한 것이 된다.

그러면 <선원계보>에서는 왜 준 의 · 의방을 제적했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고려 시대이지만 나라의 역적으로 몰린 분들이라 족보에서 빼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174년부터 1392년까지는 218 년 간이다.

16세 인(璘)공부터 태조고황제까지는 6대의 기간이니, 30년을 1세로 치면 그럴 듯하게 맞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없지 않다.

<씨족원류>에 따르면 인(璘)공의 아들로 양무(陽茂)장군과 딸 유택(柳澤)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7세(世) 양무(陽茂) [생몰 : ?∼1231]
제 17대조   이름(한글):양무   이름(한자):陽茂

16세 인공의 아들로 이름은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준경모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 로 옮겨 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 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영경모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 · 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준영경모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 · 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 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 곳 사람들은 이 두 묘를 능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곧 백우 금관(白牛金棺) 설화다.
17세(世) 양무(陽茂) [생몰 : ?∼1231](2)
제 17대조   이름(한글):양무   이름(한자):陽茂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 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 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 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 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 `1221년(고려 고종 8)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 선단(崔先旦)이 과거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는 구절이 있어 `이양무\'란 이름이 <고려사>에 단 한번 비치는데, 양무장군이 바로 이분인지는 확신이 없다. 동명이인 일 것이다.

또 <완산실록>에는 양무장군에 대한 일화가 없고 대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이 런 일화가 있다. 양무장군은 덕만(德蔓 : 德滿)으로 표기되어 있다.
17세(世) 양무(陽茂) [생몰 : ?∼1231](3)
제 17대조   이름(한글):양무   이름(한자):陽茂

덕만이 조실부모하고 경흥부(慶興府)로부터 안정부(安定府)로 옮겨와 사락(謝樂 : 오랑캐 이름)의 집에서 목동 노릇을 했다. 소와 말 1천여 마리를 기르는데, 하루는 근방의 노인 20여 명이 산에 올라 화전(花煎)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노인들이 덕만을 보고, 자기들에게 와서 심부름이나 하면 편하게 살게 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덕만은 의리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노인들이 감복하여 위로했다.

그 노인들 틈에 윤학(尹鶴 : <충효전>에는 李確)이라는 노인이 밤에 꿈을 꾸는데, 흰 용이 천랑산(天狼山 :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부터 날아서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에 놀란 그 노인이 딸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되, “엊저녁에 어떤 건장한 청년이 방으로 들어와 덮치는데 소리를 질러도 말이 입에서 안 나오고, 몸을 틀어도 몸이 빠져 나가지 않아 일을 당하고는 이름을 물으니 사락의 집 목동 덕만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그 노인이 천생연분이라 여기고 그와 결혼을 시켰다.

물론 황당무계한 설화이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은 모두 우리의 시 조로부터 태조고황제 개국 전까지의 일화를 창작하여 소설화한 것으로 흥미 본위의 야담류 (野談類)  의 작품이니 사료적 가치로야 별로 칠 것이 없지만 이런 유행본(流行本)이 있다는 것만으로 도 갸륵한 현상이라 하겠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 소를 영경묘 · 준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 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 영경묘 · 재실 ·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씨족원류>에는 양무장군에게 여동생이 있어 유택(柳澤)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 어 있는데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 · 영밀(英謐) · 영습(英襲) 3형 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 · 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파에서는 목조대왕이 주부공의 아우라고 하나 이를 증명할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