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대왕 - 시대상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시대상

 세조는 1455년 윤 6월 11일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위받아 용좌에 올랐다. 이 후 14년간의 재위 기간 중 그가 중점으로 삼았던 것은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사상의 모든 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 그가 즉위하자마자 일련의 개혁을 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오랫동안 세종과 문종을 보좌하면서 얻은 경험과 치국에 대한 공부, 그 자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조선왕조 오백년 사상 가장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한 군주로 기록되었으며, 실제로도 강력한 군주권을 바탕으로 안정된 군사력과 경제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세조가 재위 14년간 행하였던 모든 일은 거의 창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가 기획하였던 모든 사업도 당대와 성종조를 거치면서 그 성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세조의 업적을 왕권 강화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 결과 우리는 당시의 조선에 있어서 왜 이러한 정치개혁이 필요했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먼저 세조는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식을 마친 후 한확(韓確)이 백관을 인솔하고 전문(箋文)을 올리자 이에 다음과 같이 하교함으로써 앞으로의 국정운영의 대강을 밝혔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으시고 이 대동(大東)의 나라를 가지셨고, 열성께서 서로 계승하시며 밝고 평화로운 세월이 거듭되어 왔다. 그런데 주상 전하께서 선업을 이어받으신 이래, 불행하게도 국가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다. 이에 덕 없는 내가 선왕과는 한 어머니의 아우이고 또 자그마한 공로가 있었기에 장군(長君)인 내가 아니면 이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진정시킬 길이 없다고하여 드디어 대위를 나에게 주시는 것을 굳게 사양하였으나 이를 얻지 못하였고, 또 종친과 대신들도 모두 이르길 종사의 대계로 보아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고 하는지라, 필경 억지로 여정(輿情)을 쫓아 경태(景泰) 6년 윤 6월 11일에 근정전에서 즉위하고, 주상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렇게 임어하는 초기를 당하여 의당 관대한 혜택을 베풀어야 할 것이므로 경태 6년 윤 6월 11일 새벽 이전에 있었던 일로서 모반(謀反)과 대역(大逆), 또 자손으로서 조부모 또는 부모를 모살(謀殺)하였거나 또는 구매한 자,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살해한 자,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자와, 고의로 살인을 꾀한 자, 고독(蠱毒) · 염매(?魅)한 자와 다만 강도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미 결정하였거나 아직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며, 앞으로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로써 죄 줄 것이다. 아! 외람되게도 중대한 부탁을 이어받으니, 실상 두려운 걱정이 마음에 넘치는바, 실로 두렵고 삼가는 마음으로 이에 큰 은혜를 널리 베풀어 경신(更新)의 치화(治化)를 넓히고자 하는 바이다.”

 이 내용에서는 구체적으로 치도(治道)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는 이미 인사와 조직개편, 군제의 개정 등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여기서는 즉위 과정의 정당성과 대사면과 경신의 치화를 할 것을 드러내었다. 따라서 즉위 이후의 일들은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든 세조 자신의 생각이 구체화되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실제 세조가 남긴 업적이 어떠한가를 정치와 문화, 그리고 사회와 경제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세조대왕 - 왕실의 군국(軍國) 장악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왕실의 군국(軍國) 장악

 세종과 문종의 치세를 거치면서 조선왕조의 문물과 제도는 안정됨과 동시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 바탕은 학문연구와 이에 대한 지원, 인재를 적재적소에 씀으로 해서 얻는 무형의 가치, 그리고 이에 더하여 왕이 중심이 되어 만사를 주재하는데 있었다. 하나의 정책이라도 그것이 실생활과 백성들에게 편리하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를 생각하고 여론 조사를 한 후 최종 판단하여 시행토록 하는 배려를 통해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 무리가 없게 하였다.
 세조의 재위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정치개혁과 운영의 틀을 보면 크게 비대해진 관직 규모의 축소 및 재편과 용관(冗官)의 혁파를 통한 원활하고 효율적인 행정의 운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세종과 문종의 치세 동안 조선은 제도 · 문물 전반에 걸쳐 괄목할 만한 성취를 거두었고, 더불어 이를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많은 인재를 발굴 · 육성하고 이들을 관료 집단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관직이 요구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서 이것은 큰 무리가 없이 원활하게 운영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정치적 안정이었다. 정치 논리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소신있게 해나갔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확대된 기구가 자기 기능을 잃어버릴 때였다. 팽창된 기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과 인원이 요구된다. 또 역으로 한 번 팽창된 예산과 인원은 그 규모를 유지하거나 더욱 늘려나가려고 한다. 이것은 어느 시기나 사회에서 존재하는 조직 팽창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점차 쓸데없는 군살이 붙고, 기생하는 무리들이 생기게 마련이며, 이들이 점차 본래의 기능을 잠식해 들어가는 동맥경화증을 일으키게 된다.
 세조는 과감하게 이들에 대한 일대 개편과 개혁을 단행하였다. 다음의 일지(日誌)는 세조가 재위기간 동안에 행한 행정기구의 개편에 관한 것이다.

 세조 3년(1457) 7월 5일 돈녕부(敦寧府) · 중추원(中樞院) · 예문관(藝文館) · 내시부(內侍府) · 액정서(掖庭署) 등의 불필요한 관원을 혁파. 1∼5품 관원의 녹봉을 감함.
 11월 27일 악학(樂學) · 관습(慣習) 도감을 합쳐 악학도감(樂學都監)을 설치하고 장악서(掌樂署)도 여기에 소속시킴.
 세조 4년(1458) 7월 1일 아악서(雅樂署)를 전악서(典樂署)에 합침.
 12월 7일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 혁파.
 12월 19일 겸판호예조사(兼判戶禮曹事) 혁파.
 세조 6년(1460) 5월 22일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경창부(慶昌府) · 도관서(導官署) · 사첨서(司瞻署) · 주자소(鑄字所) 등을 혁파하여 100여 관직을 없앰.

세조대왕 - 왕실의 군국(軍國) 장악 (2)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5월 24일 각 사의 녹사(錄事) · 지인(知印) 등의 관원을 줄임.
 5월 26일 전농시(典農寺)를 사첨사(司贍司)로, 전구서(典廐署)를 전생서(典牲署)로 고침.
 8월 16일 중앙 관청의 구임(久任) 관원수를 개정함.
 세조 7년(1461) 3월 20일 종실 봉작(封爵)제도를 개정함.
 세조 8년(1462) 3월 21일 경시서령(京市署令)을 다시 둠. 자학(字學) · 의학(醫學) · 음양학(陰陽學) · 역학(譯學) · 이학(吏學) · 무학(武學)의 제조(提調) · 별좌(別坐) · 훈도(訓導)를 혁파하고 상급 감독 관청의 제조가 규찰하도록 함.
 세조 9년(1463) 11월 22일 식례횡간(式例橫看) 상정 작업을 독려.
 세조 10년(1464) 1월 9일 경비 지출에 새로 만든 식례(式例)를 사용하도록 함.
 세조 11년(1465) 12월 17일 제사공사계품법(諸司公事啓稟法) 제정.
 세조 12년(1466) 1월 15일 서운관(書雲觀)을 관상감(觀象監)으로, 교서관(校書館)을 전교서(典校署)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정하는 등의 관제 개편.
 8월 25일 과전법 혁파, 직전법(職田法) 실시.
 세조 13년(1467) 4월 1일 응방(鷹坊) 혁파.
 4월 24일 사옹방(司饔房)을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하고 녹관(祿官) 설치.
 세조 14년(1468) 5월 27일 보거법(保擧法) 제정.
 6월 28일 이과출신패(吏科出身牌) 개정.

 이러한 관직의 혁파와 축소 내지는 개편 등을 통해 세조는 방만하게 운영되던 공사의 효율적인 운영과 경비의 절감을 얻어낼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구체적인 실태의 파악 아래 예산 편성과 직전법(職田法)의 실시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세조는 단종조에 이루어진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六曹)로 하여금 직접 계달(啓達)토록 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함으로써 자신이 모든 일을 처결할 수 있도록 그 틀을 만들었다. 왕의 이러한 의도는 왕권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왕이 승하하거나 왕이 유충(幼沖)할 경우 의정부(議政府)에서 서사를 처리할 수 있는 비상 정국 운영이 가능하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왕이 정국 운영의 주체로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세조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1455년(세조 원년) 8월 1일에 승정원에 전교한 내용이다.
 “삼공(三公)은 세쇄(細碎)한 사무를 친히 보지 않고, 육경(六卿)은 그 직무를 나누어서 다스리는 것이 고제(古制)이다. 이제부터 육조(六曹)의 공사(公事)는 직접 계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승정원에서는 윤당(允當)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7일에 의정부에 전지하여 그의 이러한 의지를 확정지어 통보하였다.
 “상왕께서 나이가 어리시어 모든 조처를 다 대신에게 위임하여 의논해서 시행하였던 것인데, 이제 내가 명을 받아 통서(統緖)를 이으면서 군국(軍國)의 서무(庶務)를 모두 친히 보고받고 결단하여 다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이제부터 형조의 사수(死囚)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육조에서 각기 그 직무에 따라 직접 계달하라.”

 세조가 밝히고 있는 육조직계제에는 대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의 무게중심을 왕 자신에게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황표정사(黃標政事)\'로 상징되는 의정부 서사제 하에서 이뤄졌던 방만한 정치 운영 체제는 육조에서 왕으로 직접 연결되는 통치체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세조대왕 - 왕실의 군국(軍國) 장악 (3)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여기에는 사실 세조가 구상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드러나 있는 것이었다. 즉, 왕조 체제 하에서 국가의 주인은 바로 왕실이며 그 중심은 왕이라는 생각이다. 조선초의 정도전(鄭道傳)이 구상한 재상 중심 체제의 정치 형태가 왕실과 마찰을 빚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있어서도 재상권과 왕권과의 충돌이 생겼고 두 시기에 있어 모두 강력한 왕권의 대두로 귀결되어졌다.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덕치주의 하에서 유자(儒者)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옛 주(周)나라의 통치형태인 주관육익(周官六翼)체제로, 태사(太師) · 태부(太傅) · 태보(太保)의 삼공(三公)이 항구한 이치를 강론(講論)하여 나라를 경륜하고, 소사(少師) · 소부(少傅) · 소보(少保)의 삼고(三孤)는 삼공을 보좌하여 교화(敎化)를 넓히며 육경(六卿)은 직임을 나누어 맡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리고 천관(天官)인 총재(?宰)가 겸임하여 다스렸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총재의 역할이 왕을 대신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칫 왕권과 신권이라는 권력의 충돌을 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조는 총재가 겸임한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극도의 반대 입장을 표했고, 이를 바로 의정부서사제가 대두된 바탕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정치체제는 왕이 중심이 되며 삼공은 그를 보좌하고 육경(六卿)이 직임을 나누어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측의 생각은 결국 왕권의 강화를 부르짖었던 세조의 입장으로 정리되었고, 재상중심주의의 입장에 있던 사대부들의 경우는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원년 8월 8일에 하위지(河緯地)가 주제(周制)에 따라 총재(?宰)가 겸임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자 세조는 그에게 처벌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총재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임금이 훙(薨)하였을 때의 제도이다. 너는 내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느냐? 또 내가 아직 어려서 서무를 재결(裁決)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끝내 대권(大權)을 아랫사람에게로 옮겨 보겠다는 말이냐?”

 다음으로 세조가 착수한 것은 군권의 장악으로 이는 보다 효율적인 군통수권을 기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 내용은 사실 세조가 다른 무엇보다도 관심을 집중하고 끝없이 무경(武經) 등을 연구하고 주해하고, 혹은 자신이 직접 저술하면서 얻은 것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은 본래 군사의 운용과 체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 자신이 뛰어난 무예와 이와 관련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세밀하면서도 현실에 맞는 정책을 기획하고 시행할 수 있었다.

 세조는 즉위 후 곧바로 군 체제를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즉위년 9월 11일에는 병조에서 보고한 것에 따라 각 도 연해지의 요해지에 설치되어 있던 진(鎭)을 내륙의 큰 읍을 중심으로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은 이를 중심으로 편성하였다. 즉 거진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을 각 도별로 중익(中翼) · 좌익(左翼) · 우익(右翼)의 익군(翼軍) 혹은 군익도(軍翼道) 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이에 편성되지 못한 곳에는 독진(獨鎭)을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익도의 체제는 종래의 행정구역상의 도체제(道體制)와 혼동되기 쉬웠고 또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이를 일원화시키기 위한 편성 작업이 필요하였고 마침내 1457년(세조 3) 이를 바탕으로하여 10월 20일에 다시 지방 군제를 개편하여 익군 체제를 폐지하고 진을 중심으로 하는 진관(鎭管) 체제를 확립하였다
세조대왕 - 왕실의 군국(軍國) 장악 (4)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진관 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이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훈련을 독려하고 그 규율을 정하기 위한 사목을 만들었다. 이것이 1458년(세조 4) 2월에 정해지는 각 도 거진습진사목(巨鎭習陣事目)이다. 즉 기왕에 설치된 거진(巨鎭)을 중심으로 진법(陣法)을 훈련하는 절목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세조가 의도했던 것은 `자전자수(自戰自守)\'의 개념을 심는 것이었다. 이 체제하에서 각 지방 단위의 전시나 유사시에는 이러한 진관 체제가 효율적이었지만 전국을 단위로 하는 전란이 있을 시에는 유기적 관련을 기하면서 대처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약점이 노정되었다. 사실 세조 조에는 국방에 있어서 만큼은 이러한 우려를 할 필요가 없었고, 그만큼의 군사력 증강으로 이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군제의 확정과 그 운영을 위해 시급한 것은 인적 자원의 확보였다. 세조는 이러한 군사력의 확보를 위해 군정(軍丁) 및 한량인(閑良人)의 조사를 통한 정확한 군적(軍籍)을 만드는 것이었다. 작업은 전국을 단위로 하는 것인 만큼 일시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세조는 기왕에 있던 군적과 새로 조사하여 얻어지는 군정을 토대로 새로운 군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세조는 1456년(세조 2) 1월과 2월에 걸쳐 한성 군사의 군적과 평안도 · 함길도를 제외한 전국의 군적을 만들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이를 성안(成案)하는 군적사목(軍籍事目)을 만년에 이르러 제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군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는데, 1461년(세조 7) 1월에 각 도 관찰사에게 국둔전(國屯田)을 확장하도록 한 것과 1463년(세조 9) 6월에 제읍(諸邑) · 제영(諸營)의 둔전 성적(成籍)을 명한 것은 이를 위한 작업이었다. 그 결과 태조 6년의 37만명, 세종 12년의 70만명에서 세조대에는 80∼100만명으로 군정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와 작업을 거치면서 세조는 1462년 6월 진군(鎭軍)의 정수와 1466년 7월에는 병조 군기시(軍器寺)와 지방 각 진의 무기 보유량을 정하도록 하였다.

 세조조의 군제 개편 작업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고 있는 점이다. 충찬위(忠贊衛 : 1456. 12. 20), 만강대(彎强隊 : 1458. 3. 29), 하삼도 한량인으로 구성된 호익위(虎翼衛 : 1459. 3. 22), 보병 강화를 위한 파적위(破敵衛 : 1459. 9. 15), 공사 노비로 구성된 장용대(壯勇隊 : 1459. 9. 18) 등의 군부대를 설치하였다. 1460년 7월에는 지방 한산(閑散) 3품 이하의 조사(朝士)와 유음자제(有蔭子弟) 중 과전이 있는 자는 봉충위(奉忠衛), 없는 자는 공진위(供辰衛)에 소속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1459년(세조 5) 11월에는 정군(正軍)과 시위패(侍衛牌)를 정병(正兵)으로 개칭하기도 하였다. 1461년(세조 7) 7월에는 60세 이하의 한산(閑散) 3품 이하를 정병(正兵)에 속하게 하였다. 1466년(세조 12) 7월에는 제읍군사(諸邑軍士)는 3번(番), 정병은 7번(番)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또한 13년 3월에는 한성부에 잡색군(雜色軍)을 가려 뽑으면서 7만 6,036명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군부대의 설치 편성과 더불어 세조는 지휘 체제를 일원화 하거나 효율적으로 명령 · 통제하는 계통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457년(세조 3) 9월에 수군 · 육군을 나누어 육군 대장은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수군 대장은 처치사(處置使)가 맡도록 한 조치와 다시 세조 12년에 지방군의 최고 지휘관인 병마도절제사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바꾸고 그 동안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로 바뀌었던 수군의 최고 지휘권자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바꿔 주진을 담당하게 한 것도 이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조가 노력했던 군제 개혁과 개편 및 군비의 확충을 통한 군사력 강화의 내용은 곧바로 국방의 안정으로 나타났다. 내부적으로는 1465년(세조 11) 봉석주(奉石柱) · 김처의(金處義) · 최윤(崔閏) 등이 모반을 꾀한 일이나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에서 난을 일으키는 등의 소요가 있었지만 곧바로 진정되었다. 1460년(세조 6)에 신숙주가 두만강을 건너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족을 토벌한 것이나, 1467년(세조 13)에 강순(康純) 등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을 정벌하여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죽인 것은 바로 이러한 군사력 강화의 결과였다고 하겠다.
세조대왕 - 재창업(再創業)을 위한 이념 창출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재창업(再創業)을 위한 이념 창출

 세조는 왕의 생애에서 볼 수 있었듯이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과 무 양 방면에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성향과 더불어 세종과 문종 연간에 등용되고 배출된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과 그 외 현량한 신하들은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기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만큼의 학문적 성과가 쌓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왕의 관심과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세조조에도 세종조를 이어 많은 서적의 편찬이 있었다. 그 갈래를 보면 경서 및 농상서의 주석, 언해, 문집, 역사서, 악서, 무서(武書)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있었다. 이들 중 특히 세조가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무서와 사서 및 법전의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세조가 창업지주(創業之主)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많은 인력과 시간을 쏟아부어 얻을 수 있었던 성과였다.
 특히 세조조의 편찬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한 사람은 집현전 출신 학자인 양성지(梁誠之)였다. 그는 세조의 편찬사업에 적극 협조하면서 역사에서 문집, 잠서의 언해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신숙주 · 최항 · 정척 · 권람 등이 또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의 학문적 능력은 그들의 성향과는 별도로 조선 왕조의 재창업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세조와 이들이 남긴 서적들을 각 부분별로 정리하면서 세조가 가졌던 일관된 성향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세조는 즉위년 11월에 전대(前代)인 문종의 실록을 13권으로 완성한 것을 필두로, 3년 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찬을 명하였고, 이 책은 4년 1월에 완성을 보게 된다. 이 <국조보감>의 편찬 목적은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 4대에 이루어졌던 치법(治法) · 정무(政務)의 내용을 편집하여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였지만 세조 자신의 치법을 정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면서 여기에 참여한 일군의 신료와 학자들은 더욱 군주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고, 세조도 자연스레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왕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벌어진 참사를 어쩔 수 없는 천명에 의한 것으로 돌리려는 의식적 노력이 개입되어 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의 이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던 듯 하다. 세조가 더욱 강력한 군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이러한 내용들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대의 역사를 군주의 치세와 그 업적을 통해서 정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 체제의 군주상에 대해서도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을 희망하게 된다. 왕권의 운영을 통해 이렇게 정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조는 이 입장을 중심으로 하는 전대의 역사를 정리할 것을 꾀하게 된다. 바로 <동국통감>의 편찬 명령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이는 전대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의하여 재조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조대왕 - 재창업(再創業)을 위한 이념 창출 (2)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특히 세조는 <동국통감>의 편찬을 위하여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그 배경은 세조 원년 7월에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세조가 앞으로 힘써야 할 시무(時務)에 대해 그 방향을 잡도록 하였던 양성지에 의해서였다. 즉 양성지는 상소를 통하여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의 성함이 있음만을 알고 우리 나라 역사를 살펴볼 줄 모름이 심히 불가하다고 강조하고, 문과의 과거시험 과목에 <좌전> · <사기> · <통감> · <송원절요> 등의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 <고려사>를 강에 넣을 것과 김유신 · 을지문덕 이하 고려의 제 명장의 사당을 세워 문묘와 함께 무묘를 세워 제사지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세조에게 경연관으로 예문겸관 20명을 택하여 <주역> · <역학계몽> · <성리대전>을 전공한 사람 다섯, <통감강목> · <통감속편> · <송원절요> 전공인 5인, <삼국사기> · <동국사략> · <고려전사> 전공인 5인을 두어 강을 담당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양성지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곧바로 세조에게로 전해졌고 세조 또한 당대에서 역사서를 총정리하게 된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국통감> 편찬의 배경이라고 하겠다.

 즉 세조는, 문신에게 명하여 <동국통감>을 편찬토록 하였는데 “우리 나라 역사 서술이 탈락되어 상세치 않으므로 삼국과 고려의 역사를 합쳐 편년서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책에서 사료를 널리 구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1458년(세조 4) 9월에 <동국통감>의 편찬을 명한 뒤, 1463년(세조 9) 9월에 다시 최항 · 양성지 등에게 <동국통감> 편찬을 명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4월에는 마침내 예문관에서 동국통감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또한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두어 편찬을 전담하도록 하고 편차를 정하는데 있어서도 직접 강(講)을 듣고 토론하기까지 하였다.

 많은 자료의 수집과 산삭(刪削), 그리고 막대한 인원과 경비를 쏟아부으면서 동국통감 편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처음으로 동국의 전사를 정리하고 또 일정한 사관을 가지고 정리하는 형태인 통감(通鑑)의 서술 체제인지라 자연히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서술할 때에는 반드시 당대의 역사적 입장으로서 사관의 평인 사론(史論)이 들어가는 지라 쉽게 이루어지기가 어려웠던 것이고, 세조 자신도 그 편차를 정하는데 고심을 하였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몇 차례 편찬 책임자로서의 제조당상을 교체하기도 했다. <동국통감>은 끝내 세조 당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484년(성종 15) 11월에 가서 완성하여 서거정 등이 <동국통감>을 찬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가 의도하고 노력했던 <동국통감>의 편찬의지는 우리의 역사를 정리하고 역대 왕조의 역사적 평가를 내리면서 중국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업적을 능가할 만한 성과를 얻으려는데 있었다. 비록 당대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였지만 삼국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시금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료수집과 이의 해석 능력,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학자층의 역사의식 형성이라는 학문적 성과가 반영되었음을 의미하며 또 이로 인해 역사학은 진일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당대의 역사를 긍정하는 바탕 위에서 유교의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며 민본적인 덕치주의와 왕도정치에 근거하는 역사관에 다름 아니었다고 하겠다.

세조의 이러한 역사서 편찬과 더불어 특히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과 반포였다. 즉 이른바 <경국대전> 체제라고 불리우는 정치 법제의 완성 노력을 통한 `만세경국(萬世經國)\'의 틀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세조대왕 - 재창업(再創業)을 위한 이념 창출 (3)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새로운 물은 새로운 주머니에 담아야 한다는 창업초의 의도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법전의 편찬을 낳았다. 그리고 나온 것이 태조대의 정도전이 찬진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조준의 <경제육전>이다. 이 후 <경국대전>이 만들어지기까지 조선의 법제 운영의 기본원칙은 바로 <경제육전>의 운영에 다름아니다.
 즉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수정과 보충이 그것인데 1397년(태조 6)에 조준이 고려사에 보이는 법전체제를 수용하면서 당시의 개국 초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내용들을 보충하여 만든 <경제육전>의 편찬, 하륜 등이 중심이 되어 태종대에 이루어진 <원집상절(原集詳節)> 3권과 <속집상절(續集詳節)> 3권, 그리고 세종대에 이직 등이 중심이 되어 수정 보충한 <신속육전(新續六典)>, 다시 황희 등이 중심이 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수정 보완의 연속선상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먼저 선왕이 제정한 이른바 `조종성헌(祖宗成憲)\'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점과, 둘째로 법전과 법규집을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전(典)과 록(錄)의 구분은 법전의 편찬작업에 있어 중대한 원칙이었다. 영구히 실시하여야 할 법을 `전\'에 실어 `조종성헌\'의 법을 만들고 일시적으로 실시하는 법규를 `록\'에 실어 `등록\'이라는 법규집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그 내용으로, 상당히 번잡하고 적용상의 어려움을 가질뻔 하였던 시기시기 마다의 변화상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들 법전의 체제들은 유교에서 가장 문물이 극성하였던 시기로서의 주(周)나라에서 행해졌다는 육관의 통치체제를 그 형식과 이념상에 있어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즉 <주례(周禮)>에 나타나는 주관육익(周官六翼) 체제의 수용이었고, 여기에 조선이 당면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켜져야 할 원칙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중국 역대의 법체제에서 보이고 있는 내용들을 참고하고 전대 고려의 법제를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완성된 통치 체제를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첫발은 바로 세조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성격상 <경국대전>의 수찬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대의 법전을 총정리하고, 당시의 필요한 부분 뿐만이 아닌 만세토록 행용되고 규정할 수 있는 그러한 작업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세조는 5년 4월, 양성지 · 신숙주 등과 함께 당대의 유자로서 이름을 떨친 최항에게 <육전(六典)>의 수찬을 명한 이래로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두었고, 마침내 첫 작업결과로써 6년 7월에 <신정경국대전호전(新定經國大典戶典)>을, 연차적으로 7년 7월에 <신찬경국대전형전(新撰經國大典刑典)>을 반행하였다. 이 후 이 작업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매년 각전을 마무리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적어도 11년 5월에는 이 <육전>의 수찬이 마무리 되고, 이달 21일에는 이를 교정토록 하였다. 세조 12년에는 일차적으로 완성된 <경국대전>이 육전의 체계를 갖추고 나오게 됨으로써 법전의 정리와 편찬 작업은 일단락되었다. 이듬해 12월에는 이렇게 완성된 <경국대전>에서 호전(戶典)과 형전(刑典)이 반행됨으로써 세조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노력의 성과를 보게 된다.
 물론 이렇게 완성된 <경국대전>이긴 하였지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경국대전>은 아니다. 그것은 좀더 다듬어지고 보완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마무리 작업은 1474년(성종 5) 1월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마침내 세조와 성종 2대에 걸친 <경국대전>의 편찬 작업은 마무리지어졌다.
세조대왕 - 재창업(再創業)을 위한 이념 창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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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이렇게 <경국대전>의 편찬을 위해 노력했던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의의와 성격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경국대전>이 조선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생활의 기본 규범을 포괄적으로 규제한 종합법전이라는 데에 있다. <경국대전>은 유교를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국가 정치의 중앙 집권화와 토지에 대한 강력한 국가적 지배, 엄격한 사회 신분구조에 기초한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이라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 해서 조선이 표방한 유교 정치에 있어서의 덕치(德治)에는 `양법미의(良法美義)\'라는 법치(法治) 사상이 깔리게 되었다.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전제 정치의 필연적 요청으로서 법치주의에 입각한 통치규범이 완성된 것이었다.

 더불어 이를 통하여 안정된 관료제의 합리적 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후의 법전의 편찬과 정리는 모두 <경국대전>의 해석과 이의 보충에 불과한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만세성법(萬世成法)\'으로서의 의의를 가졌던 것이다. 이 외에 12년 7월에 세조는 <대명강해율(大明講解律)> · <율해변의(律解辨疑)> 등을 교정하여 각 500부 씩 간행토록 하였다.
 세조조에 이루어졌던 편찬 사업 속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은 병서(兵書)와 관련된 것이었다. 세조 자신은 이미 세종조와 문종조에 있었던 중국과 조선 역대의 전란, 군사 등에 관련된 내용들을 뽑아 만든 <역대병요(歷代兵要)>의 집필 작업에 총재관(總裁官)으로서 주체적으로 참여한 바 있었다. 또 세조 재위년 간 이루어진 군제의 개편과 군대의 창설 및 진법 훈련 등은 모두 이러한 연구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지도(地圖)를 수찬토록 한 것은 지형의 숙지와 군사 훈련의 입체적 운영을 시행할 수 있도록 의도한 데 있었다. 세조조에 연구되고 편찬된 병서의 편찬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의 전체적인 군사 배치와 그 운영 체계를 알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세조는 지도의 편찬에 착수하였고 그 성과로서 즉위년 11월에 양성지가 여연 · 무창 · 우예 3읍의 지도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해서 9년 5월에 다시 신숙주 · 양성지에게 본국지도를 수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정척과 양성지 등은 같은 해 11월에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함으로써 조선의 전체적인 지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이 후 세조는 지도 및 지리서를 총괄하려는 작업을 시도하고자 하였는데, 비록 그것은 시작 단계에서 진척되지는 않아 아쉬움을 주기는 하였지만, 지리 연구와 지도의 편찬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할 수 있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즉, 11년 6월에 세조의 명으로 공사간(公私間)에 소장한 지리서를 수집, 간행하고 조선에 없는 지리서를 중국에서 <지리대전(地理大全)>을 구해오도록 한 일이 바로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세조는 그 자신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역대병요>의 간행 보급에 일차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역대병요>의 내용은 중국의 상고시대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치는 대목부터 원대(元代)까지의 군사(軍事)와 군정(軍政)을 주요 사건별로 다루었는데, 세조 자신이 직접 쓴 <역대병요>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이 책에는 병가(兵家)의 변화와 치평(治平)의 요도(要道)가 모두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상하 수천년 이래 사적의 득실과 성패, 강약의 형세, 임전대적(臨戰對敵)에 있어서의 용겁(勇怯), 교졸(巧拙), 충성과 간사, 이 모든 행적이 일목 요연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기정(寄正)의 전술을 배우려는 자들이 어찌 <무경칠서(武經七書)>에서 찾을 필요가 있겠으며, 중용(中庸)을 배우려는 자들이 어찌 <오경(五經)>에서만 추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이러한 세조의 군정에 관한 입장은 현실적인 요구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세조대왕 - 재창업(再創業)을 위한 이념 창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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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효용으로써
“역대 전술 사례에 능통하면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고, 역대 군의 운용 사례에 통달하면 굳이 전진(戰陣)을 설치하지 않고도 승리하는, 이른바 병략(兵略)의 극치인 무승(無勝)에 다다르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조의 관점은 지속적인 병제와 군정, 그리고 병서를 찬술하는 것으로 더욱 구체화 되고 있었다. 세조는 이 역대병요를 2년 2월에 드디어 강원도 · 전라도 · 경상도에 보내어 간행하도록 하였다.

 역대병요에서는 중국에 있어서의 병란이 중심이 되고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조선의 입장, 한반도 전체 역사에 있어서의 전사(戰史)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문종조에 만들어진 <동국병감(東國兵鑑)>이다. 이렇게 하여 동아시아사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일어난 전사를 모두 수집 정리하고 해석해 낼 수가 있었으니, 그 바탕에는 <고려사>의 편찬과 <역대병요> 등의 편찬으로 경험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세조 재위 기간동안 만들어지는 병서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56년(세조 2) 8월에는 배담(裵湛)이 <무경(武經)>을 찬진하였고, 1459년 7월에는 함길도에 이 <무경(武經)> 17부를 보내도록 하였다. 1460년 2월에는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하도록 하였으며, 1461년 1월에 교서관(校書館)에서 <병요(兵要)> 200부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같은 해 3월에 <북정록(北征錄)>을 교정, 간행하도록 하였고, 1462년 2월에는 신숙주 · 최항 등이 세조가 지은 <병장설(兵將說)>의 주(註)를 찬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병장설(兵將說)>의 저술 동기는 세조가 1461년(세조 7) 10월에 장수들에게 군을 운영하는 `용병지술(用兵之術)\'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병경(兵鏡)\'을 짓고, 뒤이어 장수의 자질을 스스로 닦게 하는 `위장지도(爲將之道)\'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 내용은 병설(兵說)과 장설(將說)로 나뉘어져 서술되고 있는데, 먼저 `병설\'에서는 군을 운영하는 원칙을 `이지운용, 이용응지(以智運用 以用應智)\'의 여덟자로 집약하고 이를 연역적으로 풀이하여 정신적인 면으로서 지(智)와 행동적인 면에서의 용(用)의 유기적인 상호 보완을 강조하였다. 다음 `장설\'에서는 장수 즉 지휘관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버려야 할 폐단을 열거하여 상중하의 3등급으로 인품을 논함으로써 장수된 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경계하도록 하였다. 이 <병장설>은 처음 세조에 의해 만들어진 이 후 신숙주 · 최항 등이 주해를 붙여 8년 2월에 <어제병장설주해(御製兵將說註解)>를 완성하였고, 그 후 장수들의 수련을 독려하는 `유장편(諭將篇)\' 3편과 병법의 숙지사항을 강조한 `병법대지(兵法大旨)\'를 지었고 여기에도 신숙주와 최항의 주해를 붙여 같은 해 10월에 <어제유장편 주해(御製諭將篇 註解)>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만들어지다 보니 번잡한 것이 많다 하여 다시금 <약주 병장설(略註兵將說)>을 펴 내었고 세조 12년 9월에는, 약주 병장설 · 유장 3편 · 병법대지를 묶어 <병장설>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세조 때 병서의 편찬 작업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정책적 사업은 아니었다. 조선의 개창 이래 변방과 국내의 잦은 병란은 조선 정부로 하여금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최대의 목표는 군비의 확충과 군제의 개편 등을 통한 강병(强兵)과 이에 의한 국방의 안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일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여기에는 체계적이면서도 효율적인 계획과 관리 작업이 필요하였다. 태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기간에 추진된 것이 바로 이와 관련된 병서의 수집과 연구 및 편찬, 그리고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이었고, 특히 세조조에는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는데 <역대병요> · <병장설> · <무경> · <손자주해> · <동국지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