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군파 약사

봉성군


자가 자첨(子瞻)으로 중종대왕의 6남이다.

중종대왕의 6남으로 휘는 완(岏), 자는 자첨(子瞻)이다. 희빈(熙嬪) 남양홍씨 소생으로 희빈은 남양군 홍경주의 따님이다. 중종대왕의 3남 금원군의 동복동생이다.

봉성군은 1528년(중종 23) 4월 초9일 탄생하여 봉성군(鳳城君)에 책봉되어지고, 봉상시정 증 영의정 정유인(鄭維寅)의 딸 동래정씨와 길례하였다.

1545년(인종 1) 인종대왕의 병사를 계기로 정세를 만회한 이기(李芑)·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尹元衡) 등은 정권의 기반을 굳히고자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고, 아울러 종친 중에서 명망이 있었던 봉성군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백령(林百齡)은 때마침 하옥된 이덕응(李德應)을 위협하여 봉성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여 죄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기는 “인종대왕의 병이 위독할 때 윤임(尹任) 삼부자 등이 처음 봉성군으로서 왕위를 이으려고 하다가 형세가 불가하여 명종대왕에게 전위하였다.”고 참소하는가 하면 1546년(명종 1) 가을에는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이 밀계로서 익명서를 올려 모역을 고변하니,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대의로 처벌을 논의되어 마침내 성종대왕의 13남 영산군 이전의 전례에 따라 울진에 유배되고, 이어서 송인수(宋麟壽)의 옥사로 인하여 1547년(명종 2) 윤9월 25일 향년 20세 나이로 사사되었다.

묘소는 양주의 독정리 자좌 언덕에 모셨다.(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16이다.)

1570년(선조 3) 이준경(李浚慶)의 계청(啓請)으로 30년 만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복관되었다.

1732년(영조 8) 시호는 의민(懿愍)으로 온유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하고, 나라에 어려움을 만난 것을 민(愍)이라 한다.

배위는 동래군부인 정씨로 봉상시정 증 영의정 정유인(鄭維寅)의 따님이다. 봉성군은 외동딸만 두고 아들이 없어 성종대왕의 9남 경명군(景明君) 침(忱)의 손자이며, 경명군의 2남인 안남군(安南君) 수연(壽鍊)의 4남 문성군(文城君) 건(健)을 계자(繼子)로 삼았다. 외동 딸은 판서 심충경(沈忠謙)에게 출가하였다.
문성군은 시림군(始林君) 세준(世俊)과 한양수(漢陽守) 세주(世柱)을 낳고,
시림군은 영창도정(靈昌都正) 격(格)을 낳았고, 한양수는 완창령(完昌令) 익(榏), 견창령(甄昌令) 직(㮨), 안창수(安昌守) 억(檍)을 두었다.

영창도정은 제하(齊夏), 제익(齊翼), 제상(齊尙), 제민(齊閔), 제연(齊淵)을 낳았고, 완창령은 제화(齊華)를 낳고, 견창령은 제태(齊泰), 제항(齊恒), 제숭(齊嵩)을 낳고, 안창수는 제현(齊賢)을 두었다. 선원속보 수보 당시 완창령, 견창령, 안창수 후손들은 수단하지 않아 후손들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봉성군의 사손(嗣孫) 영창도정의 다섯 아들 후손들이 퍼져 오늘의 봉성군파를 이루고 있다.

<선원속보>를 만들 당시의 종손은 동몽(童蒙) 용규(容珪)이고, 문장은 양진(良鎭)이며, 교정유사는 범수(凡秀)이었다.

<참고문헌>
선원속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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