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응대군파 약사

영응대군


세종대왕의 제8남으로 1434년(세종 16)에 태어나 1467년(세조 13)에 별세했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대군의 휘는 염(琰), 자는 명지(明之),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1441년(세종 23)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지고, 1443년(세종 25)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세종 28)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은 성품이 공손하여 어른에게 경순(敬順)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대군을 총애하여 모든 왕자들이 궁중에서 주상을 진상(進上)이라 불렀는데 대군에게는 “너는 나이 15세 이전에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만은 진상이라 부름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또한 대군이 5세 때 세종대왕은 공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인형(人形)을 새긴 영등(影燈)을 만들어 주었는데 불꽃이 인형에 닿자 곧 타버리게 되었다. 이에 공은 영등을 끄라고 하자 세종대왕이 연유를 물으니 “사람이 상할까 해서입니다.”라고 했다.

1450년 세종대왕이 승하하자 대군은 애훼(哀毁)함이 지나쳐 문종대왕은 내탕(乃帑)을 기울여 대군의 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대군은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통달했으며 1463년(세조 9)에는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배위는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해주정씨로 이조판서 증 좌의정 충경(忠敬)의 딸과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여산송씨로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 그리고 연성부부인(延城府夫人) 연안 김씨로 목사 영철(永轍)의 딸이다.

해주정씨의 소생은 없었고, 여산송씨는 길안현주(吉安縣主) 1녀를 낳았는데 지돈녕 정국공 신 능성군 수영에게 출가하였다.

연성부부인은 청풍군(淸風君) 1남과 2녀를 두었다.

큰 딸은 현감 배사종(裵嗣宗)과 혼인했고, 차녀는 직장 조덕온(趙德穩)과 혼인했다.

청풍군은 화림정(花林正) · 수성수(隋城守) · 청연령(淸淵令) 3남과 2녀를 두었다.

화림정은 신부인 광산김씨와 혼인하여 흥선부정(興善副正) · 흥례부수(興禮副守) · 흥정부수(興貞副守) · 흥고부수(興古副守) · 흥복부수(興福副守) · 의춘부수(宜春副守) · 흥덕부수(興德副守) 등 7남을 두었다.

수성수는 당진부수(唐津副守) · 광진부수(廣津副守) 2남을 두었고, 청연령은 등림부령(鄧林副令) · 완천감(完川監) · 완산감(完山監) 3남을 두었다.
대군의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70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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