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언군파 약사

임언군


정종대왕의 8남으로 휘는 녹생(祿生), 자는 장수(長壽), 호는 선학(鮮鶴), 시호는 혜안(惠安)이다. 초수(初授)는 정(正)이었는데 명선대부에 오르고 임언군(林堰君) 현록대부(顯祿大夫)로 증직되고 영종정경부사(領宗正卿府事)를 겸하였다.

임언군은 천성이 온순하고 효와 우의를 근본으로 행동하였다. 정종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풍덕(豊德) 땅으로 갈 때 임언군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여러 형들을 따라 갔는데 항상 부왕곁을 떠나지 않고 극진한 효행을 다하였다. 부왕이 서거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3년 동안 산소 곁 움막에 살면서 애통한 예의 절차를 극진히 다하였다.

임언군은 부왕을 보필 하면서 틈이 생기면 학문에 전력하여 성현의 심법(心法)을 탐구하고 항상 어질고 올바르게 사는 길만을 걸어 왔다.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근원과 염락풍아(濂洛風雅)의 시문까지 마음속에 담아 묵묵히 정진하였다. 20세에 이르러서는 선비로서 손색이 없는 문사(文士)가 되었으나 관직을 탐하지 않고 청렴한 지표(志標)와 높은 충절(忠節)만을 지키며 살다가 1432년 4월 11일에 별세하니 조정의 많은 관료들과 원근에서 모인 종친들이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묘소는 처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자동리에 있었다가 후일에 파주시 월롱면 도내리 산 묘좌원(卯坐原)에 면례하였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고령박씨로 소윤(少尹) 박(薄)의 딸이다. 정숙하고 온화한 인품이며, 1399년 6월 8일에 태어나 1433년(세종 15) 7월 1일에 별세하였으며 묘는 합장했다.

1864년(고종 1) 황제의 칙명으로 족보를 만들게 되었을 때 운현원(雲現院) 합장(閤長)으로 하여금 임언정(林堰正)에게 군작(君爵)을 내리려 할 때 종손과 유가(有可)는 임언군의 뜻을 받들어 사양의 뜻을 전하니 조정에서는 오히려 그 절개를 가상히 보고 임언군 자손에게는 대수(代數)에 한하지 말고 대대로 사역을 면제할 것이며 관직을 바랄 때에는 문벌을 되묻지 말고 허락 하라는 칙교를 내렸다. 그 후 1872년(고종 9) 임금이 풍덕(豊德) 후릉(厚陵)에 거 둥했을 때 고적(古跡)을 둘러 본 뒤 예조판서 이건필(李建弼)에게 특명을 내려 임언군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제문을 손수 지어 보냈다. 제문에는 “옛적 우리 정종대왕께서 풍덕에 가셨을 때 오정(五正)께서는 맨 끝까지 시종을 받들어 정종대왕께 효를 다하셨다. 지(志)와 행(行)이 더욱 훌륭하셨으며 문소(文昭)의 침거(寢居)에도 정성을 다 바쳐 문안드리고 큰 절을 하셨다. 또한 성명학(性名學)을 깊이 연구하셨고 뛰어나고 높으신 기풍이신데 후릉에서 뵈옵자니 이미 세(歲)가 8임(壬)이 되었구나.”하고 탄식을 하면서 군(君)으로 추증하고 영종정경부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시호를 혜안(惠安)이라 내리고 또한 배위에게는 군부인(郡夫人)으로 책봉하였다.

임언군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판종정경부사(判宗正卿府事) 장택군(長澤君) 효자(孝慈)이고 차남은 달성부수(達城副守) 효의(孝義)이다. 네 딸들은 만호(萬戶) 안동권씨 윤신(允信) · 첨정(僉正) 영월신씨 여걸(汝傑) · 군수(郡守) 여산송씨 경문(慶門) · 군수(郡守) 순흥안씨 처선(處善)과 혼인하였다.

장택군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창화군(昌化君) 장손(長孫)이고 창화군은 다시 2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흥성부수(興城副守) 억년(億年) · 보성군(寶城君) 만년(萬年)이고 다섯 딸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의령남씨 순민(舜民) · 정랑(正郞) 청주한씨 형신(亨信) · 찬성(贊成) 수원최씨 보한(輔漢) · 현감(縣監) 전주최씨 계조(繼祖) · 현감(縣監) 거창신씨 희설(希說)과 혼인하였다. 보성군은 3남을 두었으며 장남 여회(如晦)가 다시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극계(克啓) 계열이 종가 집안으로 18세(世)에 이르기까지 장단군 진동면 초리에 백수십여 호가 집단으로 거주하여 오다가 6·25전쟁으로 인하여 1951년 피난, 현재 임언군 묘하를 중심으로 경기도 파주·고양·양주·의정부 등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1864년(고종 1) 황제 칙명에 의한 <갑자보(甲子譜)>를 시작으로 1900년 <경자보(庚子譜)>, 1959년 <기해보(己亥譜)>, 1982년 <임술보(壬戌譜)>를 끝으로 4번에 걸쳐 족보(族譜)를 편찬, 수보(修譜)하였는데 <경자보>는 당시 도유사(都有司) 교승(敎承)의 주관으로 수보를 완성하였다.

임언군 사우(祠宇)는 임언군 묘 하단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우는 중수시(重修時) 상량문에 의하면 1633년(인조 11) 3월 임인일(壬寅日)에 초가(草家)로 근구(謹構)된 것을 알 수 있고 그 후 296년이 지난 1929년 3월 23일에 부평문중 12대손 동호(東鎬), 14대손 균하(均夏), 장단문중 16대손 용선(龍善) 등의 주선으로 종중회의를 거듭한 끝에 각 문중별로 소 요자금을 거출하였다. 그리하여 장단문중에서 두부콩 1석과 현금 350원(圓), 기곡문중에서 250원, 가평문중에서 250원, 문봉문중에서 400원, 청산문중 용선(用善)이 1,000원, 강선(康善) 150원, 제호(濟浩) 150원, 기타 문중에서 200원, 합계 2,750원(圓)이 모금되어 목재는 서울 마포에서 구입, 한강으로 선재운반(船載運搬)하여 당시 문산포(汶山浦)까지 도착하여 다시 우 차(牛車)로 파주시 월롱면 도내리 묘역까지 운반하였으며 도편수(都邊首)는 서울에서 이름있는 기술자를 부르고 기초석과 장대석은 서울 서대문 신문로 유명 석재상에서 각석(刻石)하여 육로 우차편으로 운반하였으며 단장석은 종중산에서 채석하였고 기와는 장단군에서 구입하여 1년 6개월 안에 중수를 끝냈다.

그리고 사우를 중수하고 잔여금이 있어 종중산 임목을 벌목하여 매각한 대금을 합쳐 그 다음 해인 1930년에 초가 한옥 약 10평 크기의 묘사(墓舍)를 신축하였고 1969년 3월에 당시 도유사(都有司) 18대손 춘근(春根), 총무 16대손 택선(澤善) 등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이 완료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정식 이사진을 구성, 초대회장 교흥(敎興), 부회장 제영(濟英)·정무(正懋), 총무 찬의(燦誼), 재무 제국(濟國), 감사 철의(喆誼)·병운(炳云)을 선임하고 1차 사업으로 묘역 정화사업을 벌였다.

임언군 양위를 위시하여 장택군, 달성부수의 3조위를 파주시 월롱면 도내리 산 55에 면례 한 지 540년이 지나 임언군의 묘가 훼손됐을 뿐만 아니라 묘역이 협소하여 당시 종친회장 교흥(敎興)이 묘역 정화(淨化)를 결심하고 1980년 5월 18일과 동년 9월 6일 2차에 걸쳐 이사회를 열고 묘역 중수(重修)와 신도비 건립을 제의하여 전원 합의 결의하고 소요예산 확보를 위하여 22년이 경과된 족보 수보사업을 병행키로 하였다.

1980년 12월 1일 먼저 수보사업에 착수, 세대별 배당, 관(冠) 동(童) 명하전(名下錢), 특별찬조금 등 일금 8,200만원을 확보하여 1981년 4월 8일 공사를 착공하는 한편 효령대군파 기형(起亨)에게 신도비문을 의뢰하였다. 신도비는 달성부수 묘 하단에 오석(烏石)으로 높이 7척에 거북 받침과 용관석(龍冠石)을 씌워 입석 하는 등 공사기간 1년 6개월에 걸쳐 임술보 수보와 함께 묘역 정화사업을 마치고 1982년 6월 28일 신도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꾸준한 종중사업을 벌여오던 중 1994년 3월 15일 숭모재(崇慕齋)를 건립하고 그 해 10월 9일 낙성식을 가졌다.





종원 분포 상황

지역별
세대수
인구수
서울
400
840
인천
140
375
부천
70
190
파주
460
1166
고양
550
1544
의정부
272
615
양주
320
846
가평
230
650
포천
90
200
연천
10
30
옥천
70
165
공주
240
540
홍성
210
510
아산
100
230
합계
3162
7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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