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준용(埈鎔) 1870∼1917    파명:연령군(延齡君)
  자는 경극(景極), 호는 석정(石庭) · 송정(松亭). 흥선대원군이 적손(嫡孫)으로, 완흥군(完興君) 재면(載冕)의 아들이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에 세마(洗馬)가 되었다. 1886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 · 예문관 검열 · 형조참의 · 성균관 대사성 · 홍문관 직제학 ·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86년 한러밀약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원군과 협력하여 고종태황제를 폐위시키고 공을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제지로 좌절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계기로 민씨척족세력이 타도되고 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대원군은 한때 그를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기도하였으나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뒤 갑오개혁기간 중, 내무협판 겸 친군통위사(親軍統衛使) · 내무대신서리 등으로 임명되어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나 군국기무처의 반발로 내무협판직을 사임하였다. 이 후 미국인 법률고문인 그레이트하우스 및 르장드르와 접촉하여 반일친위대의 편성을 도모하는 한편, 대원군의 후원하에 밀사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호남지방의 유생과 동학농민군, 그리고 평양에 주둔한 청나라군대와 내통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서울의 친일정권을 전복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고,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압력으로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함과 동시에 주일특명 전권공사로 내정되었다. 공사직을 맡지않고 있다가 1895년 5월에 이르러 군국기무처의원 김학우(金鶴羽) 암살사건에 연루되고, 또 박영효(朴泳孝) · 서광범(徐光範) 등 친일파 내각대신의 암살을 음모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특별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국왕의 특사로 교동부(喬桐府)에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고, 그 해 8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에 유학하였다. 출국한 뒤 귀국이 허락되지 않자, 일본에 체류하다가 1897년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시찰하였고, 1899년 이후에는 다시 일본에 돌아와 지바현(千葉縣)에서 한거하    였다. 1907년 고종을 대신하여 순종이 즉위하자 귀국하였다. 1908년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이 총재로 있는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총고문을 지냈다. 1910년 이준공(李埈公)의 칭호를 받고,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뒤 육군참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