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장사공파 현조약기에는 총 1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권계(卷桂) 1334∼1418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휘성(輝星), 호는 덕은(德隱), 시호는 문정(文靖). 개성 출신으로 평장사공의 6대손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재질이 출중하였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익혀 도학(道學)이나 문필이 남보다 우뚝 뛰어났다. 1353년(공민왕 2) 도백(道伯)의 천거로 문하시중에 발탁되고 또 이듬해 국사(國師)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으니 세상에서 청렴결백하다 일컬었다. 조선 태조고황제가 그 고장에 있는 종족의 수와 화목한지의 여부를 묻고 같이 즐기다가 헤어졌다. 그후 태조고황제가 즉위하고 잔치를 베풀어 종중사람을 만나보았는데 그 때 그는 백의로 입시했다가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 때 백의로 벼슬을 받는 자가 무릇 17명이나 되었다.
 1394년(태조 3) 종부시 도제조의 벼슬을 그만두고 표연히 지리산 반야봉으로 들어가 산수를 즐기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공은 85세로 1418년(태종 18)에 세상을 뜨자 태종대왕이 심히 애도하고 예장을 명하고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은 판도정랑(版圖定郞) 경주최씨 서인(瑞人)의 딸이다.
몽제(蒙濟) 1837∼ 1908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평장사공 18대손이며 석승(錫升)의 아들이다.
 1868년(고종 5) 종친 전시 갑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 배위는 배천조씨 상섭(尙燮)의 딸과 밀양박씨 광신(匡信)의 딸이다.
선미(善味) 1278∼1340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헌경(憲暻), 호는 은정(隱亭), 시호는 문순(文純). 평창사공의 현손이며 개성 출신이다.
 행전(行典)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기개가 있고 기질이 강직하며 불의와 어울리지 않았다. 문하시중으로 왕자 사부를 겸한 아버지의 치국지도를 배우고 나라를 위하여 일신을 희생할 뜻을 굳혔다.
 1308년(충렬왕 34) 문과에 급제, 예부시랑에 기용되고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그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의리에 어긋나는 재물은 일체 탐하지 않았고 모든 비용을 절약하여 국고를 튼튼히 하였으며 왕에게 충간을 잘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1312년 벼슬에서 물러나 운봉(雲峰)의 칠리탄석천(七里灘石泉)에 몸을 감추고 산수를 즐기며 도를 닦으니 충선왕이 칭찬하며 금세의 엄자릉(嚴子陵)이라 했다.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충혜왕이 몹시 애도하며 “학행이 구전(具全)하고 천질이 순수하며 품행이 정명하며 삼강오륜에 근본한 행동거지는 가히 한백림(韓伯林)에 비길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왕이 후한 부조를 내리고 예장을 명했으며 시호를 `문순(文純)\'이라 내렸다.
배위는 문화류씨 의 딸이다.
수우(守宇) 1484∼1543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수대(受大), 호는 성재(誠齋). 파조 평장사공의 12대손이며 영광군수 원정(元貞)의 아들이다. 전북 진안 출신이며 천성이 온후 · 관대하고 근면 · 성실했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 어릴 때 학식이 풍부한 부친 그늘에서 자라며 여러 형제들과 열심히 학문을 익혔다. 그러면서도 부모봉양에 힘써 증자(曾子)의 양지(養志)와 동생(董生)의 감지지공(甘旨之供)을 다하여 부친의 귀여움을 받았다. 1508년(중종 3)에 생원시에 합격, 남평 · 고창 · 예산현감, 평강 · 문화 · 용인현령, 합천 · 순창 · 면천 · 가산 · 봉산 · 영광군수 등을 지냈고,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열두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 많은 치적을 올렸으며 1542년(중종 37)에 노령으로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묘소는 전북 진안군 성수면 거사곡 자좌에 있다.
 배위 숙부인은 연안부사 경주이씨 오의 딸이다.
수주(守宙) 1487∼1554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세운(世韻), 호는 돈재(敦齋), 시호는 문경(文敬). 평장사공의 12대손이며 통정대부 원정(元貞)의 아들이다. 전북 진안 출신으로 재질이 영특하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고, 덕행이 있었다. 1508년(중종 3)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에 기용되고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어 경연참찬관 · 성균관 대사성을 겸했다. 1511년(중종 6) 대사간, 1513년(중종 8) 대사헌, 1517년(중종 12) 홍문관 대제학 좌찬성이 되어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1519년 남곤 · 심정 등의 모함으로 조광조가 능주(綾州)에 안치되자 이를 신구(伸救)하다가 윤허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조광조가 사사되자 통탄하며 “간신들이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말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향리로 내려와 전주의 안덕원(安德院)에서 선비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그 후 임금이 여러 차례 소명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이 칭찬하며 “리수주는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현순(懸쳏 : 노닥노닥 기운 옷)을 즐기며 안덕원에서 도를 닦으니 안정(安靖)된 현사(賢士)라.” 고 하였다.
 68세로 세상을 뜨자 임금은 부음을 듣고 애도의 뜻을 표하고 후히 부조하며 예장토록 하명하고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내렸다.
 배위 정경부인은 전주최씨 은돈(隱豚)의 딸이다.
식(軾) 1395∼1470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호현(浩賢), 호는 근암(謹菴), 시호는 충정(忠靖). 한양 출신이며 평장사공의 8대손이고 진실(珍實)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친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1423년(세종 5)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 남평현감, 1426년 영광군수를 지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38년(세종 20) 예조판서에 오르고 품계가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그는 세종 · 문종 · 단종의 세 임금을 잘 섬긴 공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는데 1455년 단종대왕이 선위하고 세조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내던지고 홀연히 향리로 내려가 절개를 지키다가 세상을 떴다.
배위 정경부인은 승지 전주최씨 호(灝)의 딸이다.
안인(安仁) 1218∼1263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호는 도은(道隱), 시호는 문의(文懿). 평장사공의 손자이며 전주 출신이다.
 자라면서 도학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고을 수령이 바뀔 때마다 먼저 공을 찾아와 자문을 받았다.
 1237년(고종 24) 목조대왕이 변을 당하여 삼척으로 옮겼을 때 공은 여러 종족을 거느리고 수행하며 생사를 같이했다.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가는 곳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고 동북 천리를 왕래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중에서도 송나라의 예부 · 병부상서였던 왕령(王쫢) 형제는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여 공의 행장을 송나라 이종(理宗)에게 올렸다. 이종이 기특하게 여기고 공을 불러서 정치하는 도를 물었을 때 물 흐르듯이 아뢰었으므로 크게 칭찬하고 예부상서의 벼슬과 함께 `도은처사(道隱處士)\'라는 호를 내렸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니 고종이 문하시중을 특제하고 금자광록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그가 별세하자 원종이 심히 애도했고 조회를 정지하고 후하게 부의
를 했으며 시호를 `문의(文懿)\'라고 내렸다. 또 송나라 이종은 슬퍼하며 왕령형제를 보내어 조의하였다.
배위는 증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광산김씨 경량(鏡亮)의 딸이다.
양익(陽翼) 1198 ∼1272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운익(雲翊), 호는 지재(知齋), 시호는 문혜(文惠). 전주 출신으로 시조의 17세손이며 평장사공의 장남이다.
 1245년(고려 고종 32) 과거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시종(侍從)이 되고 그 후 삼성장군(三城將軍), 문하성(門下省) 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1250년 예부상서로 봉익대부에 이르고 1253년 세자 사부에 천거되었다. 1267년(원종 8) 사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나자 왕이 재임시의 충성과 공로를 높이 치하하고 궤장을 내렸다. 75세에 세상을 뜨자 부음에 접한 원종왕이 애도하고 후한 부조를 내려 예장케 하였고 시호를 `문혜(文惠)\'로 내렸다. 배위는 예부상서(禮部尙書) 문화류씨 언심(彦沈)의 딸이다.
영욱(永昱) 1311∼1350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근훈(謹勳), 호는 일암(逸菴), 시호는 문헌(文憲). 개성 출신이며 파조 평장사공의 5대손이며 문순공 선미(善味)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순수하고 재질이 영특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자라서 글공부에 정진하여 경학(經學)에 박통했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임금을 보필하여 충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여러 내외직을 거쳐 1334년(충숙왕 복위 3)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반드시 그의 자문을 구해 가부를 결정하였고 또 글을 청해 받아 보고 이를 결정하였다. 오직 왕실의 안전과 백성의 태평을 위해 전심전력하다가 애석하게도 나이 40세에 세상을 뜨자 충정왕이 “충신을 잃었다” 하고 애도하고 예장을 명했으며 시호를 `문헌(文憲)\'이라 내리고 그의 스승이 `일암(逸菴)\'이라 칭호했다.
 배위는 증 문하시중 광산 김씨 정(淨)의 딸이다.
원정(元貞) 1466∼1535    파명:평장사공(平章事公)
  자는 여원(汝元), 호는 성남(誠南). 평장사공의 11대손이며 팽석(彭錫)의 아들이다. 전북 진안 출신으로 천성이 온량 · 순직하고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과 감지지공(甘旨之供)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부모 섬기는 여가에 학문에 힘써 1489년(성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여 부모를 기쁘게 해드렸고 기자전(箕子殿) 참봉이 되어서도 학문에 힘썼다. 이듬해 9월 하동현감, 1492년(성종 23) 영광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1494년(성종 25) 3월 부모봉양을 위해 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내려가 농사를 지어 부모를 극진히 공양하는 한편 마을의 어진 인사를 양성했다. 향년 70세에 별세하여 전북 진안군 선친 묘하에 묻혔다.
 배위 숙인은 절도사 교하노씨 종덕(終德)의 증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