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공파 현조약기에는 총 2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동(瓊仝) 1438∼1494    파명:시중공(侍中公)
 성종 때의 문신이며 자는 옥여(玉如), 호는 추탄(楸灘)이다. 황강공의 현손 부사 달성(達誠)의 아들이다. 1461년(세조 7) 진사로 식년문과 정과(丁科)에 급제, 1465년(세조 11) 문과 중시(重試)에 1등했다. 그 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3등으로 급제, 규장각 대교(奎章閣 待敎)를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1479년(성종 10)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해 우승지가 되어 왕비 윤씨의 폐위를 극력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뒤에 석방되어 1486년(성종 17) 대사헌이 되고 예조참판 · 병조참판 · 동지중추부사 · 동지 경연사(同知 經筵事) 등을 역임하고 1494년(성종 25) 57세로 별세했다. 성종대왕이 어제(御製) 만시(挽詩)를 내렸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앞서 성종의 윤비 폐위 때 승지였다 해서 직첩을 거두었다. 황강사(黃崗祠)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구원(久源) 1579∼1675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원지(源之), 호는 월담(月潭). 세장의 손자이며 군수 견(죘)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가 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한성부우윤 지돈녕부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구징(久澄) 1568∼1648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징원(澄源), 호는 백촌(栢村). 감사 세장(世璋)의 손자이여 우승지 철(鐵)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을 거쳐 광해군 때 장령으로 있었다. 이때 연이은 옥사로 많은 종실(宗室) 대신이 무고하게 죽음을 당함을 한탄하던 차 대신 이항복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파직되고 4년 후에 문천군수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소환되어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었고 다음 해 이괄의 난 때 임금을 공주에 호종하고 돌아와 통정대부에 오르고 고산 · 선산 · 청송군수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임금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으며, 이어 형조참의 ·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고, 1647년(인조 25) 지중추부사로서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에 <강목주설(綱目註說)><가례소의(家禮疏義)><동국편류(東國編類)>가 있다.
덕린(德?) 1543∼1605    파명:시중공(侍中公)
 호는 금곡(金谷). 양후공(良厚公) 백유(伯由)의 6세손이며 사과(司果) 성량(成樑)의 아들이다. 효행이 있어 친상에 여묘(廬墓)하고 1636년(인조 14) 정려(旌閭)를 받았다. 전북 전주시 효자동 황강사(黃崗祠)에 배향했다.
목(穆) 1471∼1498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 백유(伯由)의 현손이며 호조참의 윤생(閏生)의 아들이고 목사 수(?)의 동생이다. 점필재(컒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대왕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반궁(泮宮)의 벽송정(碧松亭)에 기도를 베풀었을 때 공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무녀를 곤장을 쳐서 쫓아내었는데 후에 성종대왕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성균관에 명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유생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공은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윤필상이 정승으로 있을 때 한발이 심하자 공이 유생을 이끌고 윤필상을 탄핵하다가 공주로 귀양갔다. 이로부터 바른 말을 잘한다는 소문으로 명성을 더욱 떨쳤다. 뒤에 풀려나와 1495년(연산군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전적(典籍)으로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고 이어 영안도평사(永安道評事)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형장에 나갈 때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의 노래를 짓고 죽으니, 그 때 28세였다. 윤필상은 그래도 원한이 풀리지 않자 갑자사화 때 공을 다시 부관참시하였다. 공이 죽을 때 1세 되던 아들 세장(世璋)은 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공은 뒤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공이 공주에 귀양갔던 인연으로 공주 인사들이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저서에 <이평사집(李評事集)>이 있다.
문정(文挺) ? ∼ ?    파명:시중공(侍中公)
 호는 황강(黃崗). 시중공의 8세손이며 예의판서(禮儀判書) 여(輿)의 아들이다. 1330년(충숙왕 17) 문과 급제하였다. 누천(累遷)하여 선산부사를 역임하고 공민왕 초에 판비서감사(判秘書監事)로 치사(致仕)하고 단성익조좌명공신(端誠翊祚佐命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상호군으로 추봉되었다. 당시 국가에서 불교의 숭상과 학교의 폐지와 백일단상제(百日短喪制)의 정책을 폈으나 공이 이를 항소하여 숭불사상을 억제하고 학교제도와 3년상 제도를 복고하였다. 공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월파정(月坡亭)을 짓고 때때로 시가의 모임을 가졌으며 말년에는 고향 전주에 돌아와 발산(鉢山) 아래 한칸 집을 지어 문학대(文學臺)라 이름하고 성리학을 강론하고 선서(善書)하였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3가 마전 소재 황강사(黃崗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백유(伯由) 1341∼1399    파명:시중공(侍中公)
 백유(伯由) [1341(충혜왕복위 2)∼1399(정종 1)]
 초명은 재(才)로 시중공의 10세손이며 황강공의 손자이고 검교중추원부사(檢校中樞院副使) 몽(蒙)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효우(孝友)하고 학문에 노력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한산군 이색이 지공거(知貢擧)로 있을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청주사록(淸州司錄)에 임명되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예문관 검열에 제수된 후 수찬 · 공봉(供奉) ·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거쳐 1378년(우왕 4) 감찰사 규정(監察司 糾正)이 되었다. 그는 부친이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1381년(우왕 7) 낭중(郎中)을 배수받은 후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1388년(우왕 14)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고 좌상시 지제교(左常侍 知製敎)를 거쳐 1390년(공양왕 1) 광주목사에 나갔다가 다음 해 우산기대부(右散騎大夫) 지제교가 되고 두어 달 뒤에 예조판서가 되었다. 태조고황제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공은 지우(知遇)의 대접을 받았는데 고려가 쇠하여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공이 천명과 인심의 소재를 알아 1, 2품의 훈신(勳臣)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였다. 1392년(태조 1) 7월에 태조고황제가 즉위하자 개국공신 3품의 반열에 참여하고 10월에 추충익대개국공신(推忠翊戴開國功臣)을 받았다. 그 교서에 “경은 마음가짐이 충직하고 일을 처리함이 정상(精詳)하며 재정의 용도를 때에 따라 조절하고 순경과 역경에 임하여 지절(志節)을 한결같이 했으며 천인(天人)의 학문을 강구하고 염락(濂洛)의 `송학(宋學)\'을 깊이 사색하였도다. 위조난정일(僞朝亂政日)을 당하여 전원에 퇴휴하더니 1388년(우왕 14)에 현량(賢良)을 천거할 때 형부(刑部)에 발탁되어 기강을 세워 국체(國體)를 바로잡고 법장(法章)을 밝혀 민심을 복종케 하였나니 비록 당 태종 이세민의 창업공신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와 송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현상(賢相) 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인들 이보다 더하랴.” 하였다. 1394년(태조 3)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1395년(태조 4) 병조판서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9월에 한성부윤이 되고 1396년(태조 5)에 자헌대부 예조판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배수되었다. 1398년(태조 7) 8월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당여(黨與)로 몰리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후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다음 해인 1399년(정종 1) 7월 48세로 별세하니 임금이 3일간 철조(輟朝)케 하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예로써 장사 지내게 하고 `양후(良厚)\'라고 시호를 내리고 부조묘(不?廟)의 건립을 명하였다.
삼만(三晩) 1770∼1847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윤원(允遠), 초명은 규환(奎奐 또는 奎煥)이었으나, 만학(晩學) 등 세가지가 늦었다는 뜻으로 삼만(三晩)이라 개명하였으며, 호는 창암(蒼岩)이다. 문정공(文正公) 승길(承吉)의 17대손이며 지철(枝喆)의 아들이다. 공은 글씨쓰기에 몰두하여 벼루를 세개나 구멍을 내었다고 하며, 병중에 누워 있을지라도 하루에 천글자를 썼으며 글씨를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한점 한 획 쓰는 법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쏟아 한 달이나 걸렸다 한다. 유필(遺筆)로 하동(河東) 칠불암(七佛庵)의 편액(扁額), 전주판(全州板) <칠서(七書)> 전주 옥류동(玉流洞 : 현 교동) 월당지반(月塘池畔)의 바위에 새긴 `취리건곤 한중일월(醉裡乾坤 閑中日月)\'과 옥류동 고개 바위에 새긴 `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큰 글자가 있다. 공이 회갑 때 쓴 자서문(自敍文)에 의하면 “우연히 진(晋)나라 사람 주정(周珽)이 쓴 비단 바탕의 글씨를 얻어 당(唐)나라 때의 여러 명필에 못지 않다고 여겼다. 또한 서울에서 류공권(柳公權)의 전적(典籍)을 얻게 되어 옛사람의 붓을 다룬 뜻을 밝히고 만년에는 신라 김생(金生)의 글씨를 얻어 옛사람의 글씨 획이 실하고 슬기로움을 알았다.”고 하였으니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공과 시대를 같이한 당시 우리 나라의 대표적 선서가(善書家)로 호서(湖西)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 1786∼1856), 호남(湖南)의 창암(蒼岩) 리삼만(李三晩), 강서(江西)의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 1772∼1840)이 명필로 추앙받았다. 공과 추사와의 만남은 추사 김정희가 1840년(헌종 6) 9월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부성을 지날 때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던 공의 처소(현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동)를 찾아 백년지교(百年之交)로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추사가 귀양살이 9년만인 1848년(헌종 14) 12월에 돌아오는 길에 전주에 들러 다시 공을 찾았으나 공이 이미 세상을 뜬 이듬 해였으므로 그 후손을 찾아 문상하고 묘소에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이 오늘날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아랫자골 후록의 공의 무덤 앞에 “명필 창암 완산리공삼만지묘(名筆 蒼岩 完山李公三晩之墓).”란 묘표문(墓表文)과 “공필법 관아동 노익신화 명파중국 제자수십인 일상시습 역다천명우세 취계제자위후(公筆法 冠我東 老益神化 名播中國 弟子數十人 日常侍習 亦多薦名于世 取季弟子爲后).”라는 묘문(墓文)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묘문음기(墓文陰記)는 비치지 않고 묘표만이 고색 찬연하게 서 있다.
세장(世璋) 1497∼1562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도성(道盛), 호는 금강(錦江) 또는 어수(漁첤). 평사 목(穆)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고 1534년(중종 2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 · 지평(持平) · 교리(校理) ·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1541년(중종 36) 큰 흉년이 들자 지방관들의 구제사업을 독찰하기 위해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갔고, 이듬해 집의 · 부응교 · 시강관 · 전한 등을 역임했다. 1545년(명종 즉위) 사인(舍人)에서 직제학에 승진, 편수관을 겸했다. 1549년(명종 4)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고 그 후 예조참의 · 도승지 · 호조참의를 거쳐 1552년(명종 7)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1554년(명종 9) 황주목사로 좌천되었으나 양사(兩司)의 상소로 다시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557년(명종 12) 호분위대호군(虎賁衛大護軍)에 보직되었다. 명종대왕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수(수) 1458 ~ 1516    파명:시중공(侍中公)
 자는 군실(君實). 백유(伯由)의 현손이며 호조참의 윤생(閏生)의 아들이고 평사(評事) 목(穆)의 형이다. 1476년(성종 7) 진사가 되고 1497년(연산군 3)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배수하고 소격서령(昭格署令) 선공감 첨정(繕工監 僉正) · 성균관 직강(直講) · 회양부사를 역임하고, 충주목사에 나갔다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냇가에 작은 정자를 지어 놓고 `삼우당(三友堂)\'이라 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도량이 넓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중제(仲弟 : 穆)가 사화를 당한 뒤 조카(穆의 아들 世璋)를 큰 인재로 키우기 위하여 교육에 전력을 다하여 선업정덕(先業正德)을 빛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