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양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계림군(鷄林君) 1556∼1596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광윤(光胤), 익양군의 증손이며 명선대부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임금을 잘 호종했으므로 부총관을 지내고 군으로 봉해져 정의대부가 되었다.
광산수(光山守) 1554∼1612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효윤(孝胤), 자는 인술(仁述). 익양군의 증손이며 창선대부였다. 공은 일찍이 문예에 뛰어났으며 더욱이 시에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청원군을 모시고 산속으로 피난했는데, 피난한 지 얼마 못가서 청원군이 별세하자 산속에 임시로 매장을 하였다가, 도적을 피하여 멀리 간 어머니를 나중에 모셔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
금산군(錦山君) 1570∼1620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성윤(誠胤), 자는 경실(景實), 호는 매창(梅窓) 또는 호기(互棄), 시호는 충정(忠正). 익양군의 증손이다. 2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묘의 신주를 직청전(稷淸殿)에 모시는 일에 주력하였으며 파천시는 선친 청원군의 병환이 위중함에도 불구하고 특명에 의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어 어가를 호종했다. 그리하여 1612년(광해군 4)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뽑혀 금산군의 봉작을 받고 품계는 승헌대부가 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국정이 혼란해져 모후를 폐위하려 하며 아우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였으며 모후를 서궁에 가두자, 이에 공은 모후의 폐위가 분하고 이이첨의 망동이 걱정되어 종실 구천군 수(첱) 등 18인이 합세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광해군은 이 상소문을 보고 대노하여 공과 구천군을 먼 섬으로 귀양보내고 그밖의 사람들은 모두 파면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구천군이 나이 순서로 첫 번째로 기록되었다 하여 구천군만 유배 도중에 석방하고 공은 남해현에 그대로 유배시켰다. 공은 유배된 지 4년만에 뜻밖의 병환을 얻어 나라를 위한 근심걱정과 울분에 쌓인 채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곧 관직을 복직시키고 지방관청에서 상여로 호송하여 공신의 예로 장례하였다가, 다음 해 갑자일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교하리 장명산 아래 동향으로 이장하였다. 공은 하루도 책을 보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그 필법은 왕희지에 비길 만했다고 한다.
 공은 귀양갈 때 <남천가(南遷歌)>를 지어 괴로움을 달랬으며 <서주효행(西州曉行)>이라는 시집이 있다. <서주효행>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그 안에는 위성공신 2등 책훈 · 행장초(行狀草) · 남천가 · 한글시 등이 들어 있다.
단천도정(丹川都正) 1520∼1586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수곤(壽쥂), 호는 묵눌재(默訥齋). 익양군의 5남이다. 용모와 자태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등준시(登俊試)에 뽑히어 도정에 진봉되었다.
무림군(茂林君) 1563∼1633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선윤(善胤), 익양군의 증손이다. 처음에는 무림수(茂林守)를 받았다가 나중에 무림군으로 승계되었다. 품계는 정의대부이다. 1615년(광해군 7) 11월 5일 재야의 어진 재상들을 불러다가 나라를 바로잡자는 내용을 상소한 일이 있다. 인조반정 뒤 위리안치되었다.
운림군(雲林君) 1563∼1648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종윤(宗胤), 자는 영길(永吉). 익양군의 증손으로 명선대부였다. 용모가 매우 영준하고 담략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관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으니 승계되어 원융(元戎)의 직책을 겸하였고, 계미년에 군에 봉해졌다.
익양군(益陽君) 1488∼1552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회(懷), 자는 순지(順之), 시호는 순평(順平). 성종대왕의 8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홍씨이다. 1496년(연산군 2)에 익양군에 봉해졌다. 1510년(중종 5)에 모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산소에 여막을 짓고 집상의 예절을 다하였다. 상복을 벗자 복직해서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 종부시(宗簿寺) · 사옹원(司甕院) 도제도(都提調)와 종친부의 유사 당상관을 지냈다. 또 자손이 제일 번창하였다 하여 나라의 혼인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공의 내외에게 명하여 예를 주관하게 했다.
 1552년(명종 7) 1월 21일 별세하니 향년 65세이며, 생전의 치적을 감안하여 순평(順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도비는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주부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쓰고 도승지 김응남(金應南)이 전자(篆字)를 썼다. 이 신도비는 1984년 10월 25일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어 1987년 8월 17일 파주시에서 신도비각을 건립하여 현재 보존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터골 묘좌에 있다.
장림도정(長臨都正) 1588∼?]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경령(慶齡), 자는 덕옹(德翁). 익양군의 증손이다. 시서를 외워 세상에서 학사종신(學士宗臣)이라 일컬었다. 광해군이 모후를 폐했을 때 혼자서 서궁으로 가서 뵙고 구천군 수(첱) 등 18종친과 연명으로 소를 올려 이이첨의 그릇된 점을 아뢰었으나, 이 때문에 중한 탄핵을 받아 의금부에 갇혔다가 인조반정 뒤에 풀려났다. 병자호란 때에 부친과 함께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갔었는데, 효종대왕이 심양에서 돌아온 뒤 어제시(御製詩)를 내린 일이 있다.
 
죽림수(竹林守) 1561∼?]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영윤(英胤), 익양군의 증손이며 청성군의 3남이다. 당시 유명한 화가였으며 산수 · 우마 · 영모에 뛰어나며 영모도 8매는 덕수궁에, 산수도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고, 화조도 병풍을 남겼다.
청원군(靑原君) 1539∼1592    파명:익양군(益陽君)
  휘는 간(侃), 자는 중직(仲直), 호는 송강(松岡). 처음에 청원부정을 제수받았다가 도정에 오른 뒤 명선대부에 올랐다. 명종대왕이 경회루에서 예문시를 친히 시행하였는데 종실들이 모두 응시했다. 그 때 공은 4운시 3편을 지었는데 제2편이 뽑혀 왕실에서 기르는 말을 하사 받았다.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공이 혼전을 잘 지켰다 하여 도정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