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계산군(桂山君) 1501 ∼ ?    파명:회산군(檜山君)
 계산군(桂山君) [1501(연산군 7) ∼ ? ]
 휘는 수계(壽誡), 자는 신이(信耳). 회산군의 계자로 견성군(甄城君) 돈(惇)의 차남이다. 견성군이 1507년(중종 2) 화를 입어 멀리 귀양가 있을 때 수함 · 수계 형제가 고생이 심하여 이홍간(李弘幹)이 어전(御前)에 나가 진강(進講)할 때 이 두 형제의 고초(苦楚)를 아뢰었다. 중종대왕은 강(講)을 필(畢)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 형제를 대궐로 불러 “나이 어린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하며 두 손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2남 수계는 회산군의 후사를 이어 편히 살라 명하였다.
 공은 초수(初授)로 계산정(桂山正)을 받았고 이어 계산군(桂山君)에 오르고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이르렀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고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3월 1일 별세하니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유좌지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철성이씨와 삭녕박씨이다. 고성군부인(固城郡夫人) 철성이씨는 대사헌 백(陌)의 딸로 풍성군 · 의성부정 등 2남과 1녀를 두었다. 2월 26일 별세하니 계산군 묘소에 합부(合쯊)로 예장하였다.
 삭녕군부인(朔寧郡夫人) 삭녕박씨는 생원 진영(鎭泳)의 딸로 단성군과 창성부수 2남과 1녀를 두고 10월 5일 별세하니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직동리 축좌지원에 예장하였다.
 장녀는 문정공(文正公) 순흥안씨 관(寬)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이경상(李慶祥)에게 출가하였다.
계산군(桂山君) 1501 ∼ ?    파명:회산군(檜山君)
 계산군(桂山君) [1501(연산군 7) ∼ ? ]
 휘는 수계(壽誡), 자는 신이(信耳). 회산군의 계자로 견성군(甄城君) 돈(惇)의 차남이다. 견성군이 1507년(중종 2) 화를 입어 멀리 귀양가 있을 때 수함 · 수계 형제가 고생이 심하여 이홍간(李弘幹)이 어전(御前)에 나가 진강(進講)할 때 이 두 형제의 고초(苦楚)를 아뢰었다. 중종대왕은 강(講)을 필(畢)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 형제를 대궐로 불러 “나이 어린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하며 두 손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2남 수계는 회산군의 후사를 이어 편히 살라 명하였다.
 공은 초수(初授)로 계산정(桂山正)을 받았고 이어 계산군(桂山君)에 오르고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이르렀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고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3월 1일 별세하니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유좌지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철성이씨와 삭녕박씨이다. 고성군부인(固城郡夫人) 철성이씨는 대사헌 백(陌)의 딸로 풍성군 · 의성부정 등 2남과 1녀를 두었다. 2월 26일 별세하니 계산군 묘소에 합부(合쯊)로 예장하였다.
 삭녕군부인(朔寧郡夫人) 삭녕박씨는 생원 진영(鎭泳)의 딸로 단성군과 창성부수 2남과 1녀를 두고 10월 5일 별세하니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직동리 축좌지원에 예장하였다.
 장녀는 문정공(文正公) 순흥안씨 관(寬)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이경상(李慶祥)에게 출가하였다.
단성군(丹城君) 1549 ∼ ?    파명:회산군(檜山君)
 단성군(丹城君) [1549(명종 4) ∼ ?]
 휘는 진(鎭), 회산군의 손자이며 계산군의 3남으로 1568년(선조 1)에 단성부수(丹城副守)를 제수받고 그 후 단성수(丹城守)로 품계가 올랐으며 후일 증군(贈君)되어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이르렀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노후에 경기도 포천으로 낙향하니 회산군파 단성군 후손은 이 때부터 390여 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단성군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만년에 인근 문사들과 시서(詩書)를 교류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7월 29일 별세하니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송우리 산막동 유좌지원에 예장하였다. 슬하에 4남 6녀를 두었다.
 배위는 은진송씨와 청주정씨이다. 현부인(縣夫人) 은진송씨는 이조참판 규암(圭菴) 인수(麟壽)의 딸로 11월 21일 별세하니 합부(合쯊)로 예장하였다. 덕의부령 · 경의부령 등 2남과 1녀를 두었다.
 현부인(縣夫人) 청주정씨는 3월 13일 별세하여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초가팔리 석정 건좌지원에 예장하였다. 덕녕군 · 덕창감 등 2남과 5녀를 두었다.
단성군(丹城君) 1549 ∼ ?    파명:회산군(檜山君)
  단성군(丹城君) [1549(명종 4) ∼ ?]
 휘는 진(鎭), 회산군의 손자이며 계산군의 3남으로 1568년(선조 1)에 단성부수(丹城副守)를 제수받고 그 후 단성수(丹城守)로 품계가 올랐으며 후일 증군(贈君)되어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이르렀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노후에 경기도 포천으로 낙향하니 회산군파 단성군 후손은 이 때부터 390여 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단성군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만년에 인근 문사들과 시서(詩書)를 교류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7월 29일 별세하니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송우리 산막동 유좌지원에 예장하였다. 슬하에 4남 6녀를 두었다.
 배위는 은진송씨와 청주정씨이다. 현부인(縣夫人) 은진송씨는 이조참판 규암(圭菴) 인수(麟壽)의 딸로 11월 21일 별세하니 합부(合쯊)로 예장하였다. 덕의부령 · 경의부령 등 2남과 1녀를 두었다.
 현부인(縣夫人) 청주정씨는 3월 13일 별세하여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초가팔리 석정 건좌지원에 예장하였다. 덕녕군 · 덕창감 등 2남과 5녀를 두었다.
덕녕군(德寧君) 1595∼ ?    파명:회산군(檜山君)
 덕녕군(德寧君) [1595(선조 28) ∼ ?]
 휘는 지(콒), 회산군의 증손이며 단성군의 3남으로 초수(初授)는 덕녕감(德寧監)이다. 학문이 뛰어나 시가(詩歌)를 잘하였으며 숙종 때 인흥군(仁興君)의 차남 낭원군(郎原君) 간(?品)이 선원보략(璿源譜略)을 편찬할 때 일조를 하였다. 그 후에 정의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며 덕녕군으로 승군(陞君)하였다. 3월 11일 별세하였고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직동 자좌지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전의이씨로 판관(判官) 몽룡(夢龍)의 딸이며 5월 22일 별세하였고 덕녕군 묘소에 합부로 예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아우 덕창감(德昌監)의 차남 지립(志立)으로 후사를 이었다.
 
덕릉정(德陵正) 1563 ∼ ?    파명:회산군(檜山君)
 덕릉정(德陵正) [1563(명종 18) ∼ ?]
 휘는 향(土向), 회산군의 증손이며 풍성군의 2남이다. 초수로 덕릉수(德陵守)를 제수받고 덕릉정, 명선대부에 올랐다. 쾌활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형 덕인정과 함께 일가화목에 전념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집성촌을 이루는 데 진력하였다. 5월 26일 별세하였고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함열남궁씨와 충주안씨이다. 신부인 함열남궁씨는 직장(直長) 호(浩)의 딸로 9월 3일 별세하였고 합폄으로 예장하였다.
 신부인 충주안씨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응달동에 예장하였다. 4남을 두었는데 복립(福立) · 일지(一枝) · 일영(一英) · 일화(一花)이다.
덕의부령(德義副令) 1562 ∼ ?    파명:회산군(檜山君)
 덕의부령(德義副令) [1562(명종 17) ∼ ?]
 휘는 선(?), 회산군의 증손이며 단성군의 장남이다. 공은 포천 향리에서 학문을 닦아 덕행에 힘썼으며 온후한 성품과 인자한 자세로 주위의 칭송을 받아 덕의부령이 거주하는 마을을 `더렁말\'(덕의부령 마을)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창선대부에 올랐고 8월 21일 별세하였으며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송우리 산막동 단성군 묘후(墓后)에 신좌로 예장하였다.
 배위는 순인(順人) 칠원윤씨로 참봉 춘전(春筌)의 딸이다. 1월 17일 별세하였고 덕의부령 묘소에 합부로 예장하였다. 슬하에 정립(正立) · 윤립(允立) 등 2남을 두었다.
덕인정(德仁正) 1556∼ ?    파명:회산군(檜山君)
 덕인정(德仁正) [1556(명종 11) ∼ ?]
 휘는 준(콀), 회산군의 증손이며 풍성군의 장남이다. 초수로 덕인수(德仁守)를 제수받고 덕인정,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올랐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고 종손으로서 직분을 다하였다. 6월 3일 별세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신좌지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김해김씨로 참판 희철(希哲)의 딸과 신부인 청주한씨는 참판 청능군(淸陵君) 인길(仁吉)의 딸로 3월 25일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3합폄(三合킋)이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서평수의 2남 무립(茂立)을 계자로 삼았다.
서원군(西原君) 1556 ∼ ?    파명:회산군(檜山君)
 서원군(西原君) [1556(명종 11) ∼ ?]
 휘는 감(堪), 자는 극기(克己). 회산군의 증손이며 의성부정의 장남으로 부친의 뒤를 이어 학문이 뛰어나고 온후한 성품을 지녀서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초수로 서원수(西原守)를 제수받고 서원군,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12월 29일 별세하였고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석문산 묘좌지원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현부인 연안김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찬선(纘先)의 딸이다. 9월 1일 별세하였고 합폄으로 예장하였다. 1남 종립(宗立)을 두었다.
서창수(西昌守) 1578 ∼ ?    파명:회산군(檜山君)
 서창수(西昌守) [1578(선조 11) ∼ ?]
 휘는 용(墉), 자는 극열(克說). 회산군의 증손이며 의성부정의 3남이다. 초수로 서창수를 제수받고 창선대부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 형 서평수와 더불어 입조(入朝)하여 직간하니 광해군이 대노하여 삭탈관직하였다가 1623년(인조 1)에 복작되었다. 4월 21일 별세하였고 회산군 계하(階下)에 술좌로 예장하였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서평수의 3남 수립(秀立)으로 후사를 이었다.
 배위는 신인 풍천임씨로 승지 찬(璨)의 딸로, 1579년(선조 12) 8월 16일 태어나 정월 9일 별세하였고 서창수 묘소와 합부로 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