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군파 4세 약사에는 총 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달성도정(達城都正) 1514∼1560    파명:창원군(昌原君)
 달성도정(達城都正) [1514(중종 9)∼1560(명종 15)]
 휘는 인무(仁武), 자는 사위(士威). 창원군의 장손이며 덕진군의 장남이다.
 6세 때 어머니 청주한씨가 별세하여 계모밑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천품이 준수하고 총명하였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했다. 17세 때 사서와 오경에 통달하여 세상에서 소년 문장이라 하였다.
 1538년(중종 33) 시예(試藝)에 합격하여 달성부수(達城副守)가 되고, 1540년(중종 35) 정(正)으로 오르고 1555년(명종 10)에 도정(都正)이 되었다.
 배위 신부인(愼夫人) 전주최씨는 진의금부사 순(詢)의 딸이고,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화원도정, 차남은 화천부령, 3남은 화산부수이다.
 묘소는 선영하에 있다.
덕진군(德津君) 1469∼1521    파명:창원군(昌原君)
  덕진군(德津君) [德津君(중종 16)]
 휘는 활(?), 자는 원지(源之). 창원군의 계자(繼子) 생부는 덕원군이다.
 덕진군은 연산군이 폭정과 음학을 일삼자 여러 차례 간했으나 듣지 않자 1506년(중종 1) 종실 중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과 상의하여 반정을 일으켜 성공,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어 종1품 가선대부가 되었다.
 덕진군은 기상이 웅대하고 의지가 굳었으며 효심과 우애가 깊고 학문을 좋아하여 세칭 문장이라 일컬어졌다.
 1521년(중종 16) 6월 9일 종기를 앓다가 향년 53세로 별세하였다.
 배위 평산군부인 평산신씨는 억년(億年)의 딸로 1녀를 두어 성율(成慄)에게 출가시켰고, 배위 청원군부인 청주한씨는 충례(忠禮)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대원정(大原正)에 봉해졌으나 조졸하고, 차남은 달성도정, 3남은 난포정이다. 장녀는 김흥(金?)에게, 차녀는 이진(李?)에게 출가했다. 또한 배위는 함례군부인 함안이씨로 신(藎)의 딸인데 소생이 없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산102-2 선영하에 있다.
창원군(昌原君) 1455∼1505    파명:창원군(昌原君)
  창원군(昌原君) [1455(세조 1)∼1505(연산군 11)]
 휘는 성(晟), 시호는 장소(章昭). 세조대왕의 2남이며 덕원군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근빈(謹嬪) 박씨이다.
 1464년(세조 10) 군으로 봉해지고, 1481년(성종 12)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랐다.
 창원군은 군자의 기풍을 갖고 항상 효도하고 우애롭고 덕화(德化)의 도에 힘쓰고 여가에 문학을 익혔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창원군의 묘소는 시흥군 동면 팔애동 신림(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병좌에 예장했었다. 그러나 실전되어 내려오다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묘소부근에 살고 있던 윤씨들이 석물을 비롯하여 묘역을 마구 훼손하여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에 판윤 11대손 동현(東鉉)은 의금부에서 범인들을 압송케 하여 조사한 끝에 자백을 받고 원상 복구하게 했다. 그러나 또 다시 실전되어 오다가 일제시대 토지측량을 하면서 묘역 일대 임야와 토지가 타인의 소유로 되어 버려 묘만 남아 있었다.
 광복 후 서울이 확장됨에 따라 땅값이 오르고 주택건설이 활발해짐에 따라 소유자로부터 이장해 가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래서 1968년 8월 14일자로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산 102-2 해좌로 천묘하였다. 이 때 덕진군 · 달성도정 · 화원도정 등 4대를 함께 이장하였다.
 배위는 덕양군부인(德陽郡夫人) 교하노씨로 호신(好愼)의 딸과 광성군부인(光城郡夫人) 광주정씨로 익(益)의 딸이나 소생이 없어 덕원군의 차남 덕진군을 입양하여 계대(繼代)하였다.
화원도정(花原都正) 1552∼1603    파명:창원군(昌原君)
  화원도정(花原都正) [1552(명종 7)∼1603(선조 36)]
 휘는 위(渭), 자는 청수(淸첤). 창원군의 증손이며 달성도정의 장남이다.
 9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11세 때 모친상을 당했다. 1584년(선조 17) 3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 · 주부 · 판관 · 첨정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진충갈력(盡忠渴力)하였다.
 배위는 신부인 해평윤씨로 춘수(椿壽)의 딸이며 딸 하나를 두었고 또한 배위는 덕수이씨 선(璿)의 딸로 소생은 1남 3녀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선영하 해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