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군파 4세 약사에는 총 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금계정(錦溪正) ? ∼ ?    파명:의창군(義昌君)
  금계정(錦溪正) [ ? ∼ ? ]
 휘는 기(祺), 초수는 창선대부였다.
 묘소는 본래 진안동에 있었으나 의창군 묘와 같은 연유로 1900년(광무 4) 수원군 서여지면 북일동 구봉산 건좌로 이봉되었다. 그 후 1946년 4월 11일 종손의 주선으로 진안동에 환봉되었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청주한씨와 신부인 남양홍씨이다.
금성도정(錦城都正) 1530∼1588    파명:의창군(義昌君)
  금성도정(錦城都正) [1530(중종 25)∼1588(선조 21)]
 휘는 위(훸), 초수는 도정 명선대부(明善大夫)였다.
 학행이 뛰어나 종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묘소는 본래 진안동 계좌에 있다가 의창군 묘와 같은 연유로 1900년(광무 4) 진위군 송탄면 제역동 후산 해좌로 이봉되었다. 그 후 1954년 2월 15일 군용지(비행장) 편입으로 인하여 화장을 하였다. 1985년 <을축파보(乙丑派譜)>를 발간한 후 그 잔여금으로 진안동 산25의 4번지, 금계정 묘역 좌편에 공의 차남 담령(聃齡)과 함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배위는 신부인 의령남씨와 신부인 평강채씨이다.
 1562년(명종 17) 아들 담령을 낳았다.
동성군(東城君) 1465∼1530    파명:의창군(義昌君)
  동성군(東城君) [1465(세조 11)∼1530(중종 25)]
 휘는 순(詢), 초수는 부정(副正) 정의대부(正義大夫)였다.
 묘소는 본래 진안동 손좌에 있다가 의창군묘와 같은 연유로 화성군 마도면 중리동 사좌로 이봉되었다. 그 후 1946년 4월 11일 종손의 주선으로 진안동 산25의 4로 환봉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여산송씨이며 묘는 합폄이다.
사산군(蛇山君) 1442∼1492    파명:의창군(義昌君)
  사산군(蛇山君) [1442(세종 24)∼1492(성종 23)]
 휘는 호(灝), 초수는 정(正) 흥록대부(興祿大夫)였다. 효행이 지극하였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문집이 있었으나 6 · 25전쟁 때 재실(齋室) 화재로 유품 일체가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진안동 을좌에 있었으나 고종태황제의 능이 금곡 홍릉으로 정해지자 1900년(광무 4) 수원군 마도면 해일동 손좌로 이봉되었다. 그 후 1946년 4월 11일 종손 봉희의 주선으로 진안동 산25의 44 간좌곤향으로 환봉되었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여산송씨[1444(세종 26)∼1510(중종 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