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한정(漢井) 1668∼?    파명:완원군(完原君)
  한정(漢井) [1668(현종 9)∼?]
 자는 자화(子華), 호는 난곡(蘭谷). 순흥군의 4대손이며 훤(萱)의 장남이다.
 음사(蔭仕)로 헌릉참봉 · 봉사(奉事)를 지냈다. 현종대왕 때의 8문장으로서 이름이 나니, 우의정 최규서가 크게 칭찬했다. 현종대왕은 교를 내려 사운율시(四韻律詩)를 지어올리라 하였다고 한다.
한종(漢宗) 1661∼1720    파명:완원군(完原君)
 한종(漢宗) [1661(현종 2)∼1720(숙종 46)]
 자는 조경(朝卿), 호는 봉주(鳳洲). 순흥군의 4대손이며 훤(?)의 차남이다.
 1696년(숙종 22) 11월, 진사시에 급제하고 음사(蔭仕)로 예조 장악원 정(正)을 지냈다. 1697년(숙종 23)에는 병조 세자익위사 익위(翊衛) · 공조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을 지냈고 외관직으로 전라 고산현감을 지냈다. 공의 백형인 한익(漢翼 : 1645∼1678)은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급제했으나 향년 34세로 별세하였다. 사자(嗣子)인 조(肇)가 이조판서로서 복상(卜相)에 들어 의정부 이조판서를 증직받았다. 공이 훤(?)의 가문을 이어 조카 조(肇)와 두 조카딸, 공의 자녀 5남 2녀를 넓은 덕으로써 키우니 일가의 칭찬이 자자했다. 공은 신익상(申翼相)의 문하로서 학문을 좋아했고 문장과 사부(詞賦)에 뛰어났으며 글씨 또한 잘 썼다.
훤(훤) 1628∼1679    파명:완원군(完原君)
 훤(?) [1628(인조 6)∼1679(숙종 5)]
 자는 낙보(樂甫), 호는 도촌(道村). 순흥군의 3대손이며 상질(尙質)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665년(현종 6) 4월 정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664년(현종 5) 내시교관(內侍敎官)을 거쳐 이조좌랑 · 이조정랑 · 병조좌랑 · 예조 홍문관 부교리 · 응교 · 성균관 전적 · 교서관 교리 · 세자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 기주관 · 필선 · 보덕 · 사학(四學)교수 · 사간원 정언 · 헌납 · 사헌부 지평 · 의정부 검상(檢詳) · 사인(舍人)을 지냈으며 1669년(현종 10) 10월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하였다. 1674년 8월, 숙종대왕 즉위 초에 사간원 사간 · 사헌부 집의 · 예조 성균관 사성 · 이조 종부시 정(正)에 오르니 삼사(三司)의 아장(亞長)이었다. 전라도 순천부사와 인동부사, 그리고 1679년(숙종 5)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숙환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671년(현종 12) 1월,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 북진(北鎭) 여러 읍을 순찰할 때 상소를 올려 온성 · 경원 · 경흥 등지의 빈민들을 구제했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공은 장인인 조석윤(趙錫胤)의 문하에서 사서오경의 경전을 연구하였고 송준길(宋浚吉)이 추천하여 장의(掌議)가 되었는데, 정두경(鄭斗卿)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내렸다.

 “당대에 둘도 없는 선비이니 온통 사방이 책으로 그득하구나.(一代無雙士, 多方有五車.)”

 공은 항상 품고 있는 생각이 깊었으며 지조가 결백했다. 1674년 8월 18일 숙종대왕이 즉위하고, 12월에 청남(淸南) · 탁남(濁南), 즉, 과격파 · 온건파로 갈린 남인 족당들에 의하여 기해의례(己亥議禮)에서 기년설을 채용한 서인 족당들을 추죄(追罪)하는 일이 생겼다. 공은 사간원 사간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예문을 명확히 제시하여 송시열이 억울하게 파직되었음을 밝히고 형벌 논의에 있어 용서를 청하였으나 오히려 체직을 명받았다. 이에 승정원에서 도승지 김석주(金錫胄)와 좌승지 안진(安縝) 등이 나서서 그 명을 철회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공은 증 정부인 배천조씨(1628∼1683)와의 사이에 한익(漢翼) · 한종(漢宗) · 한장(漢章) 등 3남과 6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52세였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망릉리 중원동 임좌 언덕에 장례지냈고 묘갈을 세웠다. 공의 맏사위는 영의정에 이르러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이고, 둘째 사위는 영의정에 이르러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 문효공(文孝公) 서종태(徐宗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