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요팔(堯八) 1688∼1772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원보(元甫), 호는 병암(竝菴). 홍망(弘望)의 아들이다. 학행으로 목릉참봉에 임명되었다. 임금은 “나이가 몇이냐?”고 묻고 그 사람됨을 기꺼워하며 <맹자구해(孟子具解)> 1부를 하사하였다. 1711년(숙종 37) 봉사로 전보되고 별제를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우춘(遇春) 1677∼1757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취경(就卿), 호는 송월당(松月堂). 증 병조참판 시창(時菖)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임명되고 전출되어 내자시 주부에 봉해졌다. 절충장군에 올라 구례 · 운봉 두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이르는 곳 마다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1728년(영조 4) 선전관으로 양무원종훈에 책록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운징(雲徵) 1645∼1717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백우(伯雨), 호는 만연(曼衍). 이조판서 응시의 아들이며 지돈녕부사 의징의 동생이다. 음직으로 1677년(숙종 3) 참봉이 되고 1678년(숙종 4) 전설사 별검에, 이듬해 특명으로 평안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1689년(숙종 15) 종친부 전부에 이어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고 7월 성천부사에 임명되었다. 1690년(숙종 16)에 다시 장령, 이어 집의로 승차되고 1691년(숙종 17) 6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배수되고 1692년(숙종 18) 가선대부의 위계에 올라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1694년(숙종 20) 전라도 관찰사로 전보되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태천으로 유배되었다. 1710년(숙종 36) 2월에 특별히 방면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717년(숙종 43) 관작이 복작되고 병으로 별세했다. 임금이 듣고 특명으로 조문과 부의의 은총을 내렸다. 공은 특히 문예에 명성이 있어서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원정(元禎) 1538~1590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선장(善長), 대군의 현손이며 담양령(潭陽令) 충(忠)의 아들이다. 학행과 덕망으로 통정대부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몽상(夢祥) [1539(중종 34)∼1605(선조 38)]
 자는 경휴(景休), 호는 저당(樗堂). 대군의 현손이며 풍양도정(豊陽都正) 춘(春)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15) 무과에 올라 겸인의(兼引儀)에 배수되었다. 이어 남양감목관,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임실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정사를 보살핌이 자상하여 아전과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1592년(선조 52) 4월 왜구가 대거 창궐하여 호남과 영남이 적에게 유린당하였다. 이때 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순찰사 이광(李洸)의 막하에서 싸웠으나 여러번 패하였다. 이에 임지인 임실로 돌아와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충의로써 고을 사람을 격려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세자가 남쪽 지방에서 군사를 위로하고 수령들의 현명함을 살폈는데, 순찰사가 공의 치적을 첫번째로 보고하여 특별히 옷감을 내려 포상하였다. 1598년(선조 31) 군자감 판관 겸 익위사 사어에 임명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 향년 67세로 별세하였다. 아들 관찰공(觀察公)의 추은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과천현 장이동 선영에 장사지냈다. 그 뒤 수도 서울의 확장으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 산1번지로 이장하였다.
응명(應蓂) 1581∼1629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요서(堯瑞), 감사 정신(廷臣)의 아들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재예에 출중하여 약관에도 문사로 명성을 날렸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묵죽을 잘 그렸다. 1593년(선조 26) 박사제자로 뽑혔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인조반정 때에는 함창현감이 되었다. 다스림이 청빈하여 인조대왕이 옷감 한벌을 내려 포상하였다. 1627년(인조 5) 부친상을 당하자 장사를 지내고 여묘(廬墓)하던 중 복상을 마치지 못하고 향년 49세로 생애를 마쳤다.
응시(應蓍) 1594∼1660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군서(君瑞), 호는 취죽헌(翠竹軒) 또는 죽창(竹窓). 감사 정신(廷臣)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예빈시 별제에 보직되었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에 선발되고 이듬해 봄에 전적에 오르고 찬수청의 직임을 겸하였다. 1636년(인조 14) 봄에 연서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병자호란 때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이 부체찰사로 발탁하여 종사로 삼자 병을 무릅쓰고 빈청에 나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질병이 이 같으니 일을 맡는 것이 불가하다. 뒤에 떨어져서 병을 다스림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공은 “신하가 되어 이 같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의리상 집에 누워 있을 수 없다.”며 호가하였다. 정월에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2월에 대가를 따라 환도하여 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8년(인조 16) 봄 병조정랑에 배수되고 이어서 안악군수로 전보되었다.
 1641년(인조 19)에 병으로 벼슬을 내놓고 떠나게 되자 읍민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빌었으며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 1642년(인조 20) 가을에 성균관 정4품 사예가 되었다. 1643년(인조 21) 봄에 사헌부 장령에 배수되고 가을에 순천부사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겨울에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리고 팔마비(八馬碑)도 세워 찬미하였다. 1645년(인조 23) 여름에 군기시정에 임명되고 이어 동지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돌아왔다. 장령에 배수되어 재변(災變)을 반대하다가 유배된 리경여(李敬輿) · 심로(沈魯) · 홍무적(洪茂績)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1646년(인조 24)에 또 상소를 올려 강빈(姜嬪)의 원옥사(寃獄事)의 사사사건(賜死事件)을 극언하여 “혁혁한 주씨의 왕도는 포사가 근심스러웠고 우리 나라 300년 사직은 조숙원이 멸망시킬 것입니다. 포사는 주나라를 멸명시켰고, 여희는 진나라를 어지럽혔으며 명왕은 아내의 말을 잘 듣다가 졸지에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인도 이를 경계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신이 전하께 어찌 능히 지나치게 염려하실 것 없다고 하오리까? 항시 전하께서는 정양(靜養) 조섭(調攝) 중에 계시어 절제의 도를 마땅히 하고 여색을 멀리 하는 데 힘쓰셔야 합니다.”고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변경에 귀양보낼 것을 명하니 삼공과 양사가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겨울에 유배되었다. 1649년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석방토록 소를 올려 진정하자 임금은 직산에 이양하도록 명하였다. 이듬해 유배지에서 풀려나 가을에 의정부 검사에 제수되었다. 1651년(효종 2) 사간원 사간,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옮겼다가 부묘도감 낭청에 차출되고 홍문관 교리 · 사인을 거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52년(효종 3)에 성균관 대사성 · 도승지와 예문관 직제학, 이어서 병조참판과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1653년(효종 4) 함경도 관찰사에 배수되어 어그러진 풍속을 변화시키자 임금은 칭찬하고 표리(表裏)와 구마(?馬)로 상을 내리고 도민은 비를 세웠다.
 1657년(효종 8) 봄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전 관찰사의 잉임(仍任)으로 형조참판에 배수되었다. 3월에 판결사 겸 부총관 · 종부시 제조에 배수되었다. 이듬해 봄에 사은부사에 차출되어 중국 연경에 갔다가 가을에 돌아왔다. 겨울에 대사간에 이어 의금부의 동지사 · 비변사의 유사당상관을 겸하였다. 곧바로 대사헌에 임명되어 김홍욱(金弘郁)의 원통한 죽음을 신구(伸救)하였다.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부총관과 관상감 제조를 겸임하고 또 대사헌도 겸임하였다. 5월에 효종대왕이 승하하자 도승지 겸 사역원 제조로 옮겼으며, 한성부 좌우윤 겸 승문원 제조를 겸하고 가의대부에 올라 예조참판에 배수되었다. 1660년(현종 1)에 이조참판으로 옮겼으며 가을 감시와 회시의 시관으로 복무하였다.
 1660년(헌종 1) 11월 22일 생애를 마쳤으니 향년 67세이다. 부음을 듣고 임금은 관리를 파견하여 예에 따라 조의를 표했다. 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이듬해 봄 2월 22일 과천 장의동 건금산 선영하에 장사지냈다. 서울 도시확장에 의하여 부득이 경기도 수원시 이의동으로 이장하였다.
응원(應元) 1594∼1633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인중(仁仲), 호는 사우재(四友齋). 종부시정 겸 승지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수(義壽)의 아들이다. 음사로 통정대부 사재감정을 지냈고 사헌부 사성에 추증되었다.
응유(應?) 1584∼1653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중무(仲茂), 호는 귀의당(歸依堂). 정현(廷賢)의 아들로 선무랑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에 조행립(曺行立)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응협(應莢) 1588∼1641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성서(聖瑞), 감사 정신(廷臣)의 아들이며 배위는 홍문관 직제학 김대래(金大來)의 딸이다. 1623년(인조 1) 장흥고(長興庫)의 주부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사헌부 감찰에 오르고, 1626년(인조 4) 연천현감에 이어 지평현령에 임명되었다. 1631년(인조 9) 괴산군수에 임명되고, 1641년(인조 19) 봄에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와 6월 22일에 향년 54세로 별세하였다.
의수(義壽) 1559∼1593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자화(子華), 호는 퇴우당(退憂堂). 대군의 4대손이며 금산령(錦山令) 양(良)의 아들이다. 부사과에 임명되고 광흥수(廣興守)로 종부시정을 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음직으로 승지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때에 남포에서 창의하여 적군과 싸우다 이듬해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이 사실이 <충훈록>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