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위(瑋) 1555 ~ 1592    파명:완원군(完原君)
 위(瑋) [1555(명종 10)∼1592(선조 25)]
 자는 백규(伯規), 호는 경의재(景義齋). 완원군의 4대 종손이며 운흥정의 장남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외숙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 정발(鄭撥)과 그 휘하 병력 350명과 더불어 왜적 다수를 참했다. 그러나 부산성이 함락됨과 동시에 순절하니 춘추 38세였다. 공의 종제(從弟)완(琬)(1577∼1648)이 공의 의혼(義魂)을 불러 입던 옷과 신던 신발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운흥정 묘하 계좌 언덕 증 정부인(貞夫人) 의령남씨(1557∼1589)의 묘소에 합봉(合封)하였다. 1699년(숙종 25) 9월, 정3품 당상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추증되었고, 1722년(경종 2) 6월, 종2품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다시 추증되었다. 1712년(숙종 38) 4월, 의정부 이조판서 이인엽(李寅燁)이 비문을 찬했으나 세우지 못했고 후에 경남 거창 국농소 농산재(農山齋)에 순의사적비(殉義事蹟碑)를 세웠다. 공은 배위 증 정부인 의령남씨와의 사이에 유종(惟宗) · 유길(惟吉) · 유상(惟祥) 등 3남과 2녀를 두었다.
 1594년(선조 27) 8월, 선조대왕은 공의 장남 유종(1575∼1643)에게 선무랑(宣務郞) · 호조(戶曹) 군자감(軍資監) 종5품 판관(判官)을 내렸다. 유종은 곧 승진하여 정3품 당상 통정대부에 오르고 외관직으로 종3품 함경도 정평도호부사를 지냈다. 1699년(숙종 25)에는 현손 항(恒)(1662∼1713)이 공의 숭절(崇節)과 보공(報功)에 대한 표창은전을 상소하였다. 또한 1708년(숙종 34) 윤3월에는 좌의정 리유(李濡)와 이조판서 이인엽(李寅燁)이 계를 올렸고 사간원 사간 박행의(朴行義)가 소달(所達)하니, 숙종대왕이 정려(旌閭)의 은전을 내리고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과 일체적 정표로 포상을 내렸다. 그래서 1712년(숙종 38) 4월, 예조정랑 길경조(吉慶祖)와 공조 선공감역 이수형(李秀衡) 등이 서울 종가에 정려문 건립을 감독했다. 1791년(정조 15) 1월, 공이 동래 충렬사(忠烈祠) 배향자 명단에서 누락된 것에 대하여 거창(居昌)에 사는 윤억(尹檍)을 서두(序頭)로 한 유생 50인이 연명 발의문을 작성하였고 경상도 유생 수의명첩(收議名帖) 53주(州) 740인이 찬성하고 서명함으로써 공의(公議)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공을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과 흑의장군(黑衣將軍) 정발 등과 함께 배향코자 합의하고 1793년(정조 17) 2월, 유생 윤면흠(尹勉欽) 등 260인이 본가사적(本家事蹟)과 전후 정장(呈狀), 동래도호부의 논보(論報) 등을 연첩(連帖)하여 의정부 예조에 수차에 걸쳐 진정하였으나, 사액(賜額)한 사(祠)에 관한 것은 특은(特恩)이 아니면 어려움이 있다 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공의 차남 유길의 후손 철우(哲雨) · 창우(昌雨) · 삼우(三雨) · 춘우(春雨) 등이 주축이 되어 1994년 9월부터 2년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순의사적 등 모든 자료를 종합정리하여 관계요로에 건의 · 진정한 결과 사실(史實)이 인정되어 마침내 간절한 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공이 순절한지 404년 만의 일이다.
 1996년 3월 24일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거창의 후손들이 다수 참반한 가운데, 동년 9월 10일 충렬사(忠烈祠 : 安樂書院)에 임진순절 5현(賢) 91위(位) 합사(合祠) 위패를 봉안, 배향되었다.

유달(惟達) 1579∼1659    파명:완원군(完原君)
  유달(惟達) [1579(선조 12)∼1659(효종 10)]
 자는 겸선(謙善), 호는 백봉(白峰). 신흥수의 장남인 찬(璨)의 장남이다.
 1606년(선조 3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612년(광해군 4) 9월 증광시 별시에 병과 장원급제하였다. 승정원 정자(正字) ·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 문학(文學) · 필선(弼善) · 승정원 주서(注書) · 사헌부 감찰(監察) · 지평(持平) · 영남선유어사(嶺南宣諭御史) ·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 · 사복시(司僕寺) 정(正)을 지냈고, 외관직으로 충청도 해미현감 · 경기 도사(都事) · 전라 광주목사 · 경상도 밀양도호부사를 지냈으며 통정대부였다.
 1617년(광해군 9) 11월, 광해군이 대비전 삭호(削號)의 대론(大論)을 수의(收議)할 때 공은 당시 집권 대북파의 예조판서 겸 대제학 이이첨을 논핵 배척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공의 청명(淸名)이 자자하였다.
 공은 증 숙부인 진천송씨(1583∼1635)와의 사이에 1남 담을 두고 별세하니 향년 81세였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자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윤(贇) 1722∼1817    파명:완원군(完原君)
 윤(贇) [1722(경종 2)∼1817(순조 17)]
 자는 여질(汝質), 완원군의 8대손이고 부흥도정의 5대손이며 세열(世烈)의 아들이다.
 1754년(영조 30) 2월, 경기도과 정시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문관으로서 선전관을 겸했다가 병조 좌랑을 지냈으며 외관직으로 경상도 봉화현감을 지내고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공은 증 정부인 평산신씨(1724∼?), 증 정부인 청주한씨(1721∼1761), 증 정부인 횡성고씨(1739∼1820)와의 사이에 종섭(宗燮) · 시섭(時燮) · 응섭(應燮) 등 3남과 5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96세였다. 충청도 단양 북면 상진현 간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인호(仁鎬) 1767 ∼1815    파명:완원군(完原君)
  인호(仁鎬) [1767(영조 43)∼1815(순조 15)]
 자는 여화(汝華), 순흥군의 8대손이며 재기(在璣)의 계자이다.
 가선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은 양친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병세를 살피기 위하여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째었으니(嘗糞裂指) 당시 선비들은 극진한 효심을 존경하고 우러러 보았다. 또한 모친상을 당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주야로 슬피울며 졸도했다가 깨어나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공의 4남인 동지중추부사 운성(雲星) 역시 효성이 극진했다. 이는 별제공(別提公) 필()(1690∼?)의 충효의 뿌리가 이어진 것으로, “효문에서 효 나오니, 그 아비로 인하여 그 아들이 있다.”라고 하여 4대가 칭송을 받았다. 1897년(광무 1) 고종태황제의 특명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져 여러 대에 걸쳐 복을 누렸다. 공은 증 정부인(貞夫人) 해주오씨(1774∼1832)와의 사이에 운구(雲球) · 운행(雲行) · 운극(雲極) · 운성(雲星) · 운경(雲卿) · 운영(雲永) 등 6남과 2녀를 두고 향년 49세에 별세하였다. 전북 순창군 복흥면 대가리 굴암 아래 임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장훈(章薰) 1860∼1936    파명:완원군(完原君)
  장훈(章薰) [1860(철종 11)∼1936]
 자는 숙장(叔章), 호는 지산(芝山). 순흥군의 11대손이며 학근(學根)의 계자이다.
 한말 궁내부 예식원(禮式院) 판임(判任) 주사(主事)를 지냈다.
 1903년(광무 7) 공의 명의로 발행되던 격일간지 매일신문을 한영합판회사(韓英合辦會社)의 배설(裵說 : 베델, 영국 언론인)에게 양도하였다. 배설이 1904년(광무 8) 7월 18일자로 대한매일신보라 개제(改題)하여 창간호를 발행하니, 양기탁(梁起鐸 : 총무 겸 편집) · 박은식(朴殷植 : 주필)과 함께 실무를 담당했다. 국채보상운동 사건으로 배설이 금고형을 받게 되자 1908년(순종 2) 5월 27일자로 만함(萬咸 : 영국인, 베델의 비서)이 발행인을 맡아 1910년 6월 9일자(지령 제 1407호)까지 발행하였다. 공은 편집부에서 신채호 · 양기탁과 함께 시사평론을 담당하다가 동년 6월 14일자(지령 제 1408호)부터 다시 인수, 경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압수 · 정간(8월 11일자) · 속간, 다시 정간(8월 17일자) · 속간되는 수난을 겪으면서 동년 8월 29일자(지령 제 1461호)로 폐간됐다.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어렵던 한말에 신문 발행인으로 활약하다가, 그 후 언론계를 떠나 오로지 숭조와 저작, 선원속보(璿源續譜) 편찬사업에 전념하였으니 공은 <선릉왕자14파문헌록><홍연진결(洪煙眞訣)><문헌편고(文獻便考)><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조선당파(朝鮮黨派)><전주리씨세보(全州李氏世譜)>(선릉 14파 합보) 등도 간행했다.
 기계유씨(1858∼1902)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김해김씨(1885∼1950)와의 사이에 원구(元九)·중구(中九)·천구(天九)·윤구(允九) 등 4남과 1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77세였다. 서울시 강북구 미아동 갑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정(王+貞) 1564∼1621    파명:완원군(完原君)
  정(王+貞) [1564(명종 19)∼1621(광해군 13)]
 완원군의 4대손이고, 순흥군의 3남이며 사명(賜名)은 계송(繼宋)이다.
 공이 `계송\'이라는 사명을 선조대왕에게서 받게 된 데에는 내력이 있다. 공의 외외증조는 면앙정(쭗仰亭) 송순(宋純 : 1493∼1592)으로 판윤 현덕(玄德)의 후손이니, 송순은 1519년(중종 14) 별시 을과에 급제, 경상감사 · 전라감사 · 개성유수를 지내고 의정부 종1품 좌찬성에 이르러 기사(耆社)에 들었다가 물러나와 전라도 담양에서 여생을 보낸 누정문학(樓亭文學)으로서의 남도가단(南道歌壇)의 기틀을 세운 문장가 · 시인으로서 신평선생(新平先生)이라고 불렸다. 송순의 장남인 해관(海寬)이 전라도 담양도호부 남기곡면 상덕리로 공을 데려가 양육하게 특명하신 선조대왕이 `계송(繼宋)\'이라 사명하였다.
 공은 음사(蔭仕)로 이조정랑 겸 호조 군자감정을 지냈고, 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공은 증 정부인(貞夫人) 태인허씨(1559∼1643)와의 사이에 상온(尙溫) · 상호(尙皓) 등 2남과 2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58세였다. 묘소는 전남 담양군 구암면 기곡리 능내동 무량치 자좌 언덕이다.
정훈(珽薰) 1845∼1915    파명:완원군(完原君)
  정훈(珽薰) [1845(헌종 11)∼1915]
 자는 인장(仁璋), 초휘는 순헌(順憲), 호는 송암(松菴). 예흥수의 11대손이며 윤석(胤錫)의 장남이다. 1877년(고종 14) 무과에 뽑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중추원 칙임 의관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에 올랐다. 공은 7세인 1851년(철종 2) 6월 26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조부 규상(奎祥)에게서 훈도를 받아 문학 · 경사 · 재예를 익히고 조부모를 힘써 공양했다. 평안도 함종군수를 제수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공은 정부인 순흥안씨(1841∼1911)와의 사이에 민구(玟九) · 충구(忠九) · 항구(杭九) 등 3남과 2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71세였다. 경기도 양주 누원내동 서남 곤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조(肇) 1666∼1726    파명:완원군(完原君)
 조(肇) [1666(현종 7)∼1726(영조 2)]
 자는 자시(子始), 호는 학산(鶴山). 완원군의 8대손이고 순흥군의 5대손이며 한익(漢翼)의 아들이다.
 1696년(숙종 22) 8월, 정시(庭試) 을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 정랑이 되어 대제학 강현(姜?)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했다.
 1706년(숙종 32) 홍문관 교리 · 직제학 · 의정부 검상(檢詳) · 사인(舍人) · 승정원 승지 · 형조 · 예조 · 병조판서를 지냈다. 1721년(경종 1)에는 형조와 예조, 1724년(경종 4)에는 병조판서 선혜청 당상 · 실록청 당상 · 비변사 수어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오르니, 대총재(大?宰)로 복상(卜相)에 들었다. 외관직으로는 황해도 연안도호부사 · 강원 · 평안 · 경기 · 강원도 감사를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영의정 최석정은 한어(漢語)를 잘 아는 관원을 가려서 뽑는 예조 사역원 한학(漢學) 겸(兼) 교수(敎授)로 공을 추천하였다.
 경종대왕이 사자(嗣子)없이 병환이 깊어지자 1721년(경종 1) 8월,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는 수찰(手札)로 왕제 연잉군(延仍君, 후의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그러자 노론 족당(族黨)이 동년 10월 정무를 대리케 하려다가 시행되지 못했는데 그 과정에서 공은 형조판서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대리하라는 교지를 거두어들일 것\'을 주청했다.
 동년 12월, 소론 족당은 노론 족당의 건저(建儲) 4대신(리이명, 김창집, 리건명, 조태채)을 각각 남해 · 거제 · 홍양 · 진도로 귀양보내고, 이듬해 1722년(경종 2) 3월, 이들을 사사하는 대옥사(壬寅睦虎龍誣告大獄事)를 일으켰다. 그러나 1724년 8월에 연잉군이 영조대왕으로 즉위하여 `임인대옥사\'를 일으킨 소론 족당을 실각시키니, 이 당쟁은 이인좌의 난으로 이어졌다. 공은 그 와중에 1725년(영조 1) 경상도 밀양도호부 읍으로 귀양가게 되었고 이듬해 1월 5일 별세하니 향년 61세였다.
 공은 청백하다는 명성이 높았고 공무를 집행함에 있어서 항상 엄정히 바로잡아 다스리고 너그럽게 어루만져 백성을 교화하였다. 이에 이조판서 겸 대제학인 이덕수(李德壽)는 신도비의 명(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썼다.

 “덕망이 있어 추앙받는 분이니, 재상에 듭심은 가뭄에 비를 얻음이라(人望入相若旱援雨).”

 공은 증 정경부인 달성서씨(1664∼1732)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고, 종질인 정섭(鼎燮)(1699∼1767)을 계자로 삼았다. 우의정 오명항(吳命恒)의 주청으로 영조대왕은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혼을 위로하였고,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완원군 묘 우측 인좌 언덕에 장례지냈다.
진(진) 1562∼1607    파명:완원군(完原君)
  진(王+眞) [1562(명종 17)∼1607(선조 40)]
 자는 총숙(聰叔), 호는 기곡(錡谷). 완원군의 4대손이고 순흥군의 장남이다.
 1585년(선조 18)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했고, 1605년(선조 38) 4월 증광시 병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96년(선조 29)에는 효릉참봉과 순릉참봉 봉사(奉事)를 지냈고 1602년(선조 35)에는 예조 장악원 직장(直長) · 호조 사섬시(司贍寺) 참상주부 · 한성부 참하 겸 참군을 지냈다. 1605년(선조 38)에는 예조 세자시강원 필선 겸 보덕을 지냈으며 외관직으로 1602년(선조 35) 전라도 동복현감을 지냈다. 후에 이조판서 겸 경연지사 · 의금부지사 · 예조 춘추관 지사 · 세자시강원 좌빈객 ·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공은 예조 홍문관 옥서(玉署) 남상(南床)으로 향시(鄕試)의 고시관을 두 차례 맡았고, 문장 · 예법 · 덕학이 뛰어나니 사림들이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명망이 같다고 추앙했다.
 공이 성균관의 재생 대표인 장의(掌議)가 되어 재회(齋會)를 주재할 때 내외명(內外命)의 친척을 배척하는 상소를 논술하였는데, 보는 이마다 모두 명소(名疏)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증 정부인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아들 상검(尙儉)과 1녀를 두었고 증 정부인 함안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상질(尙質)과 1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선영 임좌이며 1715년(숙종 41) 8월, 공의 현손인 통정대부 행 연안도호부사 조(肇)가 묘표를 세웠다.
창섭(昌燮) 1719∼1800    파명:완원군(完原君)
  창섭(昌燮) [1719(숙종 45)∼1800(정조 24)]
 자는 희문(希文), 호는 도은(陶隱). 부흥도정의 6대손이며 후(텋)의 3남이다.
 1747년(영조 23) 생원 ·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754년(영조 30) 증광시 을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 예조좌랑 · 병조정랑 · 문겸선전(文兼宣傳) · 세자시강원 필선 ·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외관직으로는 경상도 칠원현감을 지냈다.
 공은 학문이 깊고 덕행이 두드러져 사우(士友)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고 소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출사하지 않고 충청도 보령에서 두문불출했다. 증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1717∼1770), 정부인 남양홍씨 (1732∼ ?)와의 사이에 1남 재민(在民)과 2녀를 두고 별세하니 향년 82세였다. 묘소는 충남 보령시 청소면 홍도원 정문동 을좌 언덕에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