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4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상융(尙隆) 1588∼1653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성백(成伯), 목사 정현(廷顯)의 아들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양주목사를 역임했다.
서룡(瑞龍) 1570∼ ?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대군의 4대손이며 추산부령(秋山副令) 양(讓)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1606년(선조 39)에 대정현감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던 중 종제 사룡 · 성룡과 함께 홍수로 인해 별세했다. 그 해 5월 본가에서 알아보니 섬의 암석에 `종제 두 사람과 일행 30여 명이 표류하다가 이곳에서 양식이 다하여 죽는다.\'고 씌어져 있었다.
석징(碩徵) 1647∼1710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대이(大而), 호는 송당(松堂). 대군의 7대손이며 이조판서 응시의 아들이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재질이 뛰어났다. 음사로 옥천군수 겸 청주진관병마절도사에 임명되고 이어 통정대부에 올라 황주목사를 지냈다.
세림(世霖) 1634∼1702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택부(澤夫), 좌승지 정랑의 아들이다. 음사로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관에 제수되었다.
수징(壽徵) 1650~710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원경(元卿), 사복시정 정량의 손자이며 동규(東葵)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오위장을 지냈다.
숙(쳀) 1781∼1861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경경(慶卿). 증 호조참판 종희(宗禧)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행 칠곡부사를 역임하였다. 수직으로 가선대부에 올라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배수되고 증조부까지 3대에 걸쳐 증직 은전이 있었다.
시백(時白) 1571∼1649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우(守愚). 대군의 4대손이며 한음군(漢陰君) 현(俔)의 아들이다. 공은 원래 천성이 효성스러워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입에 넣고 아버지의 병을 대신하고자 기도를 드렸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처음에는 세마에 배수되고 여러 차례 주현을 맡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와 연루되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폐모에 관한 청정에도 불참하여 부친 한음군과 함께 삭출당했다. 1630년(인조 8)에 영동현감에 제수되고 종친부 전부(典簿)에 배수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79세이다.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신수(神壽) 1573∼ ?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금산령(錦山令) 양(良)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두 형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사했다.
영복(靈福) 1753∼1814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자는 복삼(福三), 호는 남계(南溪). 석현(碩炫)의 아들이다. 학행이 높았으며 벼슬을 버리고 시문에 능통하여 문하생이 많았다. `남계선생\'이라고 불려졌다.
예수(禮壽) 1562∼ ?    파명:임영대군(臨瀛大君)
  대군의 4대손이며 금산령 양의 아들이고 의수의 동생이다. 무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남포에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참판에 추증되었고, 이 사실이 <부평읍지>에 실려 있다.
 상룡(祥龍) [1567(명종 22)∼1640(인조 18)]
 자는 운길(雲吉), 대군의 4대손이며 춘산군(春山君) 검(儉)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워 가선대부의 위계에 오르고 부령부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