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군파 4세 약사에는 총 2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강양군(江陽君) 1520∼1578    파명:양원군(楊原君)
  강양군(江陽君) [1520(중종 15)∼1578(선조 11)]
 휘는 옥호(玉糊), 호는 매곡(梅谷). 양원군의 4남으로 1520년(중종 15) 6월 22일 태어났고 초수에 강양정(江陽正)을 제수받았으며 문장과 재덕이 당세에 저명하였고, 매화를 사랑하여 호를 매곡이라 하였다. 우재(于齋) 류몽인(柳夢寅)에게 학문을 배웠다. 1578년(선조 11) 3월 27일에 별세하였고 시흥시 조남동 초산하 간좌에 예장 하였다.
 배위 현부인 전의이씨는 첨지 승석(承碩)의 딸로 4월 4일에 별세하였고 부군묘 부좌 쌍폄으로 안장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낙창정(洛昌正)이며 장녀는 부사인 원주변씨 기(璣)에게 차녀는 창원황씨 용중(用中)에게 출가했다.
낙원부수(洛原副守) 1599∼ ?    파명:양원군(楊原君)
 낙원부수(洛原副守) [1599(선조 31)∼ ? ]
 휘는 세관(世寬), 양원군의 증손이며 모친은 상주김씨이다. 사적은 전해지는 바 없으나 다만 광해군 때 대비를 폐하려고 할때 이르기를 “나이 어리고 용렬하여 다만 임금을 사랑할줄만 알고 다른 것은 모릅니다. 조정에서 사대부의 충직한 의론을 따르소서.”라고 말하여 의연한 정도를 지켰다.
 배위는 남양홍씨로 부호군 수덕(壽德)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진 · 차남은 승(昇) · 3남은 인, 4남은 만(曼)이고, 장녀는 진주소씨 일우(一宇)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정식(鄭植)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수월암리 곤좌에 예장하였다.
낙창정(洛昌正) 1555∼1619    파명:양원군(楊原君)
  낙창정(洛昌正) [1555(명종 10)∼1619(광해군 11)]
 휘는 인서(麟瑞), 양원군의 손자이며 강양군의 아들이다. 1555년(명종 10) 4월 19일에 태어나 1619년(광해군 11) 6월 22일 별세하였다. 처음에 창선대부와 영(令)을 제수받았고 정으로 추증되었다.
 모친은 전의이씨로 첨추 승석(承碩)의 딸이다. 배위는 신부인 남양홍씨 병사 언성(彦誠)의 딸과 신부인 풍천임씨로 첨지 희전의 딸이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봉릉도정, 차남 학릉정, 3남 금릉도정, 4남 화릉감, 5남 한릉감이며 1녀는 거창신씨 연(?)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시흥시 조남동 초산 간좌에 예장하였다.
무창군(武昌君) 1562∼ ?    파명:양원군(楊原君)
  무창군(武昌君) [1562(명종 17)∼ ? ]
 휘는 효생(孝生), 양원군의 손자이며 화령군의 장남이다. 1562년(명종 17)에 태어나 4월 2일에 별세하였다. 정의대부와 군에 봉해졌고 모친은 강릉김씨이며 배위는 현부인 안동권씨로 봉사 근(瑾)의 딸이다. 2남을 두었으니 장남 순양군(順陽君), 차남 언양군(彦陽君)이다. 묘소는 중랑구 망우동 옥녀봉 아래 선영 묘역 손좌에 예장하였다.
상원군(祥原君) 1593∼1637    파명:양원군(楊原君)
  상원군(祥原君) [1593(선조 26)∼1637(인조 15)]
 휘는 세령(世寧), 자는 자안(子安). 양원군의 증손으로 1593년(선조 26) 12월 2일에 태어나 향년 43세로 1637년(인조 15) 정월 22일 별세하였다. 생모는 현부인 상주김씨로 좌의정 귀영(貴榮)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엄 엄숙하고 과묵하였다. 경전자사(經傳子史)를 배우기 좋아하였고 널리 통달하고 밝게 이해하였다.
 손수 논어(論語)를 써서 밤낮으로 독송하였다. 성년이 되어 관례를 치르고 상원수를 제수 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주창하여 온 조정이 부화뇌동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과 아우인 진원군만이 오직 정도를 지켜 굴복하지 않았으며, 권력을 쥔 조신들의 뜻에 거슬려서 거의 화를 입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형인 여원공, 중제 낙원공과 의논을 하고 정도를 지키어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후금군사들이 쳐들어오자 공과 진원군은 인열왕후 혼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갔으며, 어가는 남한산성에 머물고 있을 때 강화진을 침범하자 위급함을 부중(府中)의 정불공(鼎彿公)에게 알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며 말했다. “나라일이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살아서 무엇하리오.” 모친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하물며 왕실의 지친임에 나도 여기서 죽겠다.”고 하였으며 공은 울면서 명을 받고 나아가 말하기를, “포로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어떻겠소.” 하며 성이 함락되자 공은 갑옷을 벗어 종복에게 주고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남문루에 올라가 불을 놓아 자분하였다. 모친과 배위인 문의조씨가 동시에 순절하니 효종대왕이 심양에서 돌아와 인조대왕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상원군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일은 신이 직접 목격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정표와 은전을 내릴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유사가 황망하여 거행치 못하고 다만 김씨 · 조씨를 열녀로 정하였다. 그 후 1731년(영조 7) 증손 채원(採遠)이 상소하고 예조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다시 아뢰어 승헌대부 상원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1788년(정조 12) 공의 현손 명현(命鉉)이 상소하여 충신 충열공(忠烈公)으로 증시되었다.
 남은 옷으로 의정부시 녹양동 선영 유좌에 의관 예장 하였다. 그 충신 · 정려문이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야당리 341-1 상원군 사당에 있으며 정려문의 글은 서유린(徐有隣)이 썼다.
순양군(順陽君) 1583∼ ?    파명:양원군(楊原君)
  순양군(順陽君) [1583(선조 16)∼ ? ]
 휘는 흔(昕), 양원군의 증손으로 무창군의 장남이다. 기일은 4월 14일이다. 모친은 현부인 안동권씨로 봉사 근(瑾)의 딸이다.
 처음에 정의대부를 제수받고 봉군이 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강릉김씨로 첨정 눌(訥)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태방 · 차남 인방 · 3남 원방이며 장녀는 동래정씨 관(琯)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강릉최씨 여찬(汝瓚)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능촌 안산 축좌에 예장하였다.
양원군(楊原君) 1492∼1551    파명:양원군(楊原君)
 양원군(楊原君) [1492(성종 23)∼1551(명종 6)]
 휘는 희(憘), 자는 흔보(欣甫), 증시(贈諡)는 정혜(貞惠)이다.
 성종대왕의 막내로 1492년(성종 23) 음력 2월 12일에 태어나 1551년(명종 6) 5월 12일에 명철방(明哲坊) 저택에서 향년 60세로 별세하였고 경기도 성남시 복정동 산20번지 곤좌에 예장하였다. 슬하에 4남 8녀를 두었다. 어머니는 중추부사 집현전 제학 남양홍씨 일동(逸童)의 딸로 7왕자 3옹주를 두었고 숙의(淑儀)가 되었다. 숙의 남양홍씨는 유언 하기를 “후일 내게 제사를 지낼 때 또한 내 어머니에게도 제사를 같이 지내도록 하고 내가 입장할 산에 계장(繼葬)을 하는 자손이 묘제를 지내라.(子孫我祭則亦我母氏,吾入葬地山繼葬子孫奉祭墓山)”고 하였으며 유언에 따라 그 후 양원군의 장자인 함녕군(咸寧君) 수선(壽璿)이 별세하여 숙의 묘 서쪽에 예장하니 후에 함녕군 종손이 봉제사 하여왔다. 성종대왕은 그 다음 해인 1494년(성종 25) 음력 12월 24일에 승하 하였다. 중종원년에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옥책(玉冊)을 개정(改正)하여 양원군에게 원종1등훈(原從一等勳)이 사급(賜給) 되었다. 그 후 5년이 되는 경오(庚午)년에 모후(母后)인 숙의 남양홍씨가 별세하여 3년상을 치렀다.(성종왕자 14파 문헌록). 양원군은 천품이 영민 숙성하고 충효 사상이 탁월하였으며 온화 관대하였고 물욕이 없었으며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한 생활로 시종일관 하였다. 배위 문천군부인(文川郡夫人) 평양조씨는 좌찬성 경(經)의 딸로 후사 없이 음력 12월 15일 18세로 별세하여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 산147번지에 예장하였다가 1993년에 묘역이 주택 개발지로 수용되어 복정동으로 이장 양원군 묘에 부우 하였다. 배위 양근군부인(楊根郡夫人) 문화류씨는 우찬성(右贊成) 종손(終孫)의 딸로 1527년(중종 22) 음력 6월 4일에 별세하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산48번지에 예장하였고 그 후 1994년에 묘역이 상수도 용지로 수용되어 성남시 복정동으로 이장, 양원군 묘에 부좌하고 묘역을 정화 하였다. 배위 선산김씨는 중추부사 여생(麗生)의 딸로 음력 2월 19일 별세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산29번지 옥녀봉(玉女峰) 아래 손좌에 예장하였다. 대왕이 교지에 사급(賜給)한 전토는 전라도 낙안(樂安)에 답 5결 60복, 경상도 함안(咸安)에 전 44복 2결 · 답 83복 2속, 의령(宜寧)에 전 55복 4속 · 답 1결 66복 9속이었다. 선세유문(先世遺聞)에 의하면 양원군의 유택지는 처조부인 안숙공(安肅公) 계문(季聞) 묘하 손좌에 있으며 안숙공은 손녀 사위인 양원군을 지극히 사랑하여서 “양원군은 사후 나의 장지 인근으로 오도록 하라.”는 유언에 의한 것이었다. 묘갈이 파손되어 1796년(정조 20)에 9대손 통훈대부 사간원 정언 윤행(允行)이 개수하였다.
 양원군의 장녀는 현감 성주이씨 완(完)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군수 광산김씨 복휘(復輝)에게, 3녀는 봉사(奉事) 파평윤씨 황(滉)에게, 4녀는 찰방(察訪) 단양우씨 승경(承慶)에게, 5녀는 봉사 창원황씨 수천(壽千)에게, 6녀는 참봉(參奉) 전의이씨 대윤(大胤)에게, 7녀는 현감(縣監) 영산신씨 경(鏡)에게, 8녀는 현감 남원양씨 훈(訓)에게 출가하였다.
언양군(彦陽君) 1585∼1647    파명:양원군(楊原君)
  언양군(彦陽君) [1585(선조 18)∼1647(인조 25)]
 휘는 엽(曄), 자는 숙(淑), 호는 송은(松隱). 양원군의 증손으로 무창군의 둘째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9월 9일에 태어나 1647년(인조 25) 9월 28일 별세하였다. 배위는 부호군 수찬(守贊)의 딸로 현부인 경주김씨이다.
 초수는 부령으로, 소나무를 좋아하였으며 문장과 예학이 뛰어나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인목대비를 서궁에서 폐비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흉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양주 망우리로 퇴거하여 살다가 병자호란으로 정축년 남한산성 아래서 굴욕의 맹세로 북오랑캐가 왕래하는 것을 볼수가 없어 호남으로 내려가서 능주 송석면 제촌에서 어민들과 섞여서 살았다. 신인 경주김씨와 혼인하여 두아들 정방(挺芳) · 진방(振芳)과 3녀를 두었다. 장녀는 청주한씨 지(祉)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이천서씨 익중(益中)에게 3녀는 장흥임씨 성윤(聖尹)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전남 화순군 이양면 송정리에 예장하였다.
여원도정(礪原都正) 1583∼1653    파명:양원군(楊原君)
  여원도정(礪原都正) [1583(선조 16)∼1653(효종 4)]
 휘는 세헌(世憲)이고 자는 공칙(公則)이다. 양원군의 증손으로 1583년(선조 16) 6월 6일에 태어나 1653년(효종 4) 2월 2일 별세하였다.
 모친은 여량송씨로 풍저창수 빈(賓)의 딸이다. 공의 인품은 관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대의를 굳게 지켜서 이치상 조금도 꺽인 적이 없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할때에 왕자 가운데 흉론에 붙여서 종실을 위협하고 조정을 소란케 할 때 공을 요청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왕자 규가 광해군에게 간곡히 참소하여 죄줄 것을 아뢰었으나 다행히 면하였다.
 또 폐모에 더불치 않은 자는 즉각 화를 입었으나 공은 고의로 견책을 범하여 스스로 사직하고 끝내 조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처음에 창선대부였으나 승계 후 명선대부로 추증 되었다.
 배위인 함평이씨는 군수 찬(璨)의 딸이며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정(晸) · 차남 섬(暹) · 3남 신(晨) · 4남 창(昌) · 5남 성(晟)이며, 장녀는 판서 경주김씨 남중(南重)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문화류씨 면에게 출가했다.
연성부정(蓮城副正) ? ∼ ?    파명:양원군(楊原君)
  연성부정(蓮城副正) [ ? ∼ ? ]
 휘는 옥정(玉精), 양원군의 2남이다. 배위 혜인(惠人) 광주안씨는 판서 윤덕(潤德)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고 아들인 숙(淑)은 조졸하였고, 딸은 평강채씨 흥선(興先)에게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