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대왕 - <경국대전> 완성과 법치. (3)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따라서 이를 통해 조선의 정치 제도는 일단의 정리를 보임으로써 왕실의 여러 문제뿐만 아니라 행정 · 문화 · 교육 · 제도 · 군사 · 외교 등의 세세한 일들에 대한 처리와 이를 관리 기획하는 관원들의 승진 및 처우 등의 문제에 대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춰가며 운영해 나갈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양법미의(良法美意) · 만세성법(萬世成法) · 조종성헌(祖宗成憲)의 정신이 구현되면서 조선은 법치주의를 좀더 자신감있게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법정신을 고유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법적용에 있어서 경국대전을 기초로 우선 적용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즉 고려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판례, 관습법과 조선조에 들어와서 여러 차례 나온 규정, 수교, 속록 등을 하나의 틀로 정리한 것이다. 특히 성종이 세종조 이래로 관심을 두고 지속적으로 해 온 법전 편찬 사업을 마무리지었다는 것은 성종 시대에 있어서 군신의 협력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었다. 세종조에 등용되어 세조조를 거치면서 성종조에 그 능력을 완숙하게 보인 양성지 · 최항 · 신숙주 · 정인지 · 서거정 · 이극배 · 어세겸 · 허조 · 손순효 · 강희맹 등의 학자들은 그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의 법전들은 <경국대전>에 대한 해석과 보완 등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성종대왕 - 균형과 조화속의 왕권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균형과 조화속의 왕권

 군주제를 통치의 기본방식으로 하여 운영할 경우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결정적 정치력을 발휘하는 주체는 바로 왕이다. 왕의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 능력, 성격, 추진력, 정치적 균형감각 등이 당시기의 국가 운영을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왕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의 손과 발이 돼주는 신하들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부정 부패를 일삼는다면 또한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아무리 위에서 정치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소용 없게 된다. 군과 신, 군과 민, 신과 신, 신과 민, 민과 민의 관계는 결코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유기적인 관계로 하나의 생명체와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은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또 하나의 틀로 움직여 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종 역시 이러한 점에 대한 인식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특히 세조와 예종조를 거치면서 강화된 왕권은 자신의 의지를 강화시켜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세조와 예종은 충분히 왕권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의 신료도 이를 보좌하는데 있어서 그 책임을 다한 관계로 이 시기의 조선정치사는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성종이 성장하면서 원상(院相) 및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정치 운영을 하던 형태는 결국 성종이 정국 운영의 주체가 되는 방향으로 되었다. 따라서 다시금 국왕을 중심으로 한 왕권의 운영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친정(親政)을 회복한 성종이었지만 당금의 정치세력을 모두 통괄하기란 어려웠다. 세조조의 정난(靖難) · 좌리(佐理) · 좌익(佐翼) · 적개(敵愾) · 익대(翊戴) 등의 공신 세력이 점차 연배가 차 생을 다하거나 관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정권의 향배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원로로서의 힘은 가지고 있었다.
성종대왕 - 균형과 조화속의 왕권 (2)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원상(院相)체제의 해체는 어찌 보면 성종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해 나가려고 한 첫 시도였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정치 권력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아직 부족하였다. 성종이 집현전 학사 출신의 원로 세력과는 다른 신진 사류를 등용하고자 한 것은 그 부족한 균형치의 값을 찾으려고 한 데 있었다. 고려의 길재나 정몽주의 후손 및 후학들을 녹용한 것이라든가 김종직 등의 신진 사류들을 등용한 것은 그 일환이었던 것이고 성종은 이러한 작업이 성공을 거두자 명실공히 강력한 왕권의 운영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성종의 이러한 시도는 당대에 있어서는 강력하면서도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왕권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세력 균형이라는 정치적 의미는 매우 단순할 듯하지만 고도의 정치적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특히 신구 세력이 병존하고 있을 때 정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는 왕의 입장은 어느 한편을 손들어 줄 수는 없게 된다. 그것은 국가와 왕실의 보전이라는 대명제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폐비 윤씨의 사건에 대해 성종이 취하였던 일련의 판단과 행위가 그러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 후 신구 세력의 정치적 충돌은 훈구 대신과 사림이라는 갈등 구조를 낳았고 연산군 이래의 사화는 그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었다. 이를 볼 때 성종이 정치적 균형과 조화를 구상하고 시행함에 있어 그만의 정치 스타일을 통해 잘 운영하였는가를 알 수 있지만 또 반대로 성종 사후 벌어진 정치 갈등의 증폭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해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성종 재위 25년간의 정치 운영 기초에는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이 있었다. 1471년(성종 2) 3월 좌리공신을 정하고, 원년 이래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 병전(兵典)의 관제를 시행하였으며, 3년 1월 관찰사가 병마사를 겸임하도록 한 것과 4년 5월에는 고려 이래로 백성들에게 그 먹이 등을 충당하도록 해 물의를 빚어왔던 좌우 응방(鷹坊)을 혁파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1478년(성종 9) 7월에는 참판 이하의 문무관을 교차(交差)하도록 하여 권력의 분산을 도모하였고 13년 11월에는 처음으로 변방의 급무를 처리하는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의 칭호가 나타났으며 14년 8월에 동반 궐처(闕處)에 서반 서용을 허용하고, 다음 달인 12월에 분풍저창(分豊儲倉)을 양현고(養賢庫)로, 1484년(성종 15) 1월 전교서(典校署)를 교서관(校書館)으로 개칭하였다. 1488년(성종 19) 5월에는 그 동안 그 치폐에 논란이 많았던 유향소(留鄕所)의 설치를 명함으로서 그 논의를 일단락 지었다. 6월에는 유향소복립사목(留鄕所復立事目)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유향소의 복립이 정해짐으로써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으로서 향리와 관청 노비의 불법을 규찰, 불효불목(不孝不睦)에 대한 감찰, 미풍 양속을 유지하는데 공헌을 하게 되었다.

 특히 성종 때 마련된 유향소의 복립이 갖는 의미는 사회질서 회복운동으로서만이 아니라 지역질서의 운영의 주체가 누가 될 것이냐라는 문제에 대한 향배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지방 사회에서의 `활리(猾吏) · 간민(姦民)\'의 규제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서 지방관을 먼저 들 수 있겠으나 이들은 임기제인 관계로 세세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었다. 따라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그들과 야합할 수 있었다. 지방관 · 향리 · 민에 대한 견제는 바로 지방 사회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사림 세력이나 중앙에서 품관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유자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김종직 등의 사림세력은 이러한 통제 규제 역할의 유향소에서 성리학인 사회질서 즉 향음주례(鄕飮酒禮)나 향사례(鄕射禮)를 주 내용으로 하는 자치 활동을 함으로써 지방사회를 보다 교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종도 여기에 대해 일단은 긍정을 하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보류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림세력의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고 당시 지방사회에 횡행하면서 골치를 썩이던 도적들에 대한 통제도 가능하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하였다. 더욱이 유향소의 복립이 결정됨으로써 이 후 지방사회는 사림이 중심이 되는 향촌 자치 질서의 확립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중기 이후 대두되는 향약(鄕約) 보급운동이나 서원(書院)의 활성화는 서로 연관되는 것이다.
성종대왕 - 국방의 강화(건주위 정벌)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국방의 강화(건주위정벌)

 군사의 문제는 국가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군국(軍國)이라는 표현은 그 중요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고 어느 시기 어느 통치자에 의해서도 이는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전쟁이나 사회 혼란이 발생하였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평화 및 안정기에 있어서도 잠재적 전쟁 대비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에 있어 국방의 문제에 대해 특히 적극적으로 대처한 군주로는 태종 · 세종 · 세조 · 성종 · 광해군 · 효종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성종조의 군제 및 국방 정책에 대한 가장 큰 업적은 전국의 군적(軍籍)을 파악하는 한편 국방의 강화를 도모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쪽의 야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정책을 취하여 북정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당시 건주위정벌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성종조의 군사 정책은 대체로 세조가 이루어놓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 머물렀다. 그러나 방만한 군정의 확보와 운영의 면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정확한 군정과 군적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특히 세조 및 성종대에 있어서 국내외에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여건은 군비의 감축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군량미로서의 예비미도 큰 감소를 보게 된다. 훗일 이이(李珥)가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는 그 시초가 성종조의 평화와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군사력의 중대성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군역(軍役)은 다른 직역을 갖지 않은 일반 남정이 지어야 하는 것으로서 요즈음의 병역의무와 비슷하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정(男丁)으로 매년 일정기간 병역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 점이 오늘날의 병역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에 있어서도 병역은 모든 양인에게 수행토록 되었으나 양반관료는 병역으로 대치되는 직역을 수행하고 양인 군역도 초기의 경우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던 것이 중 · 후기에 이르면서 이른바 대립제(代立制) 혹은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등으로 표현되는 바와 같은 군역을 돈으로 대신하는 폭넓은 현상으로 자리변화된다. 특히 대립은 세조 및 성종조에 있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성종은 대립으로 인해 군적이 혼란스러워지고 번상(番上)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1471년(성종 2) 당번 군사의 대립을 엄금한 것이라든가, 1472년(성종 3) 11월에 수군의 대립을 엄금한 것, 5년 1월 선상노자(選上奴子) 대립(代立)규정을 제정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성종대왕 - 국방의 강화(건주위 정벌) (2)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대립의 엄금은 사실 군정의 정확한 파악과 군적의 정비를 요한다. 군정의 정원과 신상 명단이 정확히 파악되면 자칫 방만해 군사행정의 혼란으로 경제적인 문제라든가 훈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액의 파악을 위해 역대 제왕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종 원년 각 병종의 군액과 번상수를 개정하면서 총군액 11만 468명으로 파악되었다. 3년 2월 하삼도 정병의 군액을 줄이고 번상병(番上兵)을 개적(改籍)하도록 하면서 충청도 1만 8,581명, 전라도 2만 7,731명, 경상도 1만 9,015명을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1475년(성종 6) 9월에도 직업군인으로서 갑사(甲士) · 별시위(別侍衛) · 파적위(破敵衛) · 친군위(親軍衛)와 일반 평민이 속하는 정병(正兵) · 수군(水軍) 등 각 병종별 군액을 정하였다. 같은 달 각 도 정병(正兵)의 정원과 유방(留防) · 번상(番上) 인원을 정하였다. 이와 같은 작업을 거치면서 1477년(성종 8) 병조에서 올린 군적을 보면 전국의 정병은 13만 4,973명이며 이에 따르는 봉족(奉足)은 33만 2,746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후 성종조에는 10여 년 뒤인 1486년(성종 17) 6월 군적(軍籍)의 개수를 명하게 되고 4년 뒤인 1490년(성종 21)에 이르러 병오년(丙午年) 군적이 완성되어 총군액 15만 8,127명으로 파악되었다. 이후 계속된 평화는 군액의 축소와 국방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성종조에 있어서 국방의 문제는 대부분 북쪽 여진족과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왜구의 침입은 이미 세종조의 대마도정벌 이후 거의 안정을 찾고 대신 무역활동 허가 등으로 그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사소한 충돌이 벌어졌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 또 이와 함께 변방 및 연안에 방어용 성을 계속적으로 축조함으로써 군사적 대비를 늦추지 않았던 것도 그 요인의 하나였다. 1473년(성종 4)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경상도 · 전라도 · 경기도 · 황해도 · 충청도 연안에 대한 경비 강화를 명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북쪽의 여진족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대규모의 침략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조선뿐만 아니라 명에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1474년(성종 5) 9월 여진족의 상경 횟수를 제한하는 한편 그들의 움직임에 감시를 철저히 하였다. 혹 발생할 일을 정확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해 6년 5월 봉화사목(烽火事目)의 규정을 엄수하도록 하였다. 여진족은 1475년(성종 6) 2월에 영안도(함경도) 온성(穩城) · 경원(慶源), 평안도의 창주(昌洲) · 벽단(碧團) · 벽동(碧潼) 등지에 침입하는 등 그 움직임이 대규모화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 여진족의 중심지는 압록강 건너편의 지역인 건주위(建州衛)였다. 그 동안 조선은 세종 때에는 4군 6진을 설치하여 방어를 철저히 하였다. 세조 때에도 1차로 명군과 합세하여 건주위를 토벌하기도 하여 그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모아 나가면서 다시 그 세력을 확대시키기에 이르렀다.

 1479년(성종 10) 10월 명에서 건주위 토벌에 병력의 동원을 요청하자 어유소(魚有沼)를 수장으로 군사를 보냈지만 압록강의 물이 녹아 작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회군하였다. 이 후 명의 요구와 한명회 등의 요청으로 다시 11월에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정벌토록 하여 여진족의 본거를 쳤지만 미리 대비하고 흩어진 여진족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였다.

건주위의 여진족은 그들의 주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점차 만주지역을 무대로 그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다시 1491년(성종 22) 1월 올적합(兀狄哈)의 여진족 1,000여 명이 영안도의 경흥(慶興)에 침입하자 4월에 북정(北征)을 논의한 뒤 허종(許琮)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이것이 성종조의 마지막 북정이 되었고 이 후 조선의 군사력은 침체 일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연산군의 실정과 중종조 및 그 이후의 국내 정치의 혼란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편 건주위의 여진족은 더욱 세력을 확대하면서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 등으로 혼란을 겪는 사이 누루하치를 중심으로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청조(淸朝)이다. 명과 조선의 군사력의 쇠퇴는 결국 만주족인 여진족을 중심으로 한 청제국을 창건하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성종대왕 - 경제제도의 완성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경제제도의 완성

 앞에서도 계속해서 밝혔듯이 성종 때는 조선초기 제도의 완성기이자 동시에 변화의 시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국대전>이라는 초유의 완성된 법전과 그 체제의 적용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의 측면에서도 성종조는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과전법(科田法) 체제에서 세조조 직전법(職田法) 체제로 그리고 성종조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전세감납절목(田稅監納節目)이 마련된 것은 그 일환이었고 세조가 시도하였던 경비지출 내역서로서의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을 1473년(성종 4)에 완성함으로서 체제상의 예결산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특히 관수관급제는 1466년(세조 12) 정해진 직전법의 실시에 따른 부작용 즉, 토지의 세습과 겸병 및 관리들의 수탈이 다시금 일어나게 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관에서 직접 거두어 관을 통해 지급하는 형태로 현물 녹봉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훈구 및 공신의 과다로 인한 급전의 확대 및 세습의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고 이를 여하히 해결하느냐에 달렸던 것인데 성종은 관수관급제를 통하여 해결하였던 것이다.
 성종조는 세조조에 기획되고 제시된 계획을 완성해 나갔던 수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번영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적어도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내지는 반갑자의 공력이 최소한 들어가야 그 성과를 볼 수 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군주로서의 자질로 본다면 성종은 세종과 세조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즉위한 뒤 왕이 이룬 학문적인 수준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군주 체제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1인 중심 운영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그 1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운영 체계의 움직임이 이루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세조조 이 후 10년만인 1471년(성종 2) 4월 강원도 · 황해도 · 영안도 · 평안도에 대한 양전의 실시를 명하여 그 동안의 토질과 생산력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소유주 등을 파악토록 하였다. 본래 양전은 세종 때의 공법 실시 이래로 20년마다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경국대전>에도 이 같은 사항이 기록되었다.

 조선 초기 급격히 향상된 생산력과 또 반대로 기근 · 홍수 등의 재해로 인한 농민의 유리는 조세원인 전토에 대한 재평가가 요구되게 마련이었다. 즉 진전(陳田) · 황전(荒田) · 신간전(新墾田) · 비착전(肥脊田) 등의 구분이 분명히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1462년(세조 8)충청도와 전라도의 양전을 끝으로 10여 년이 지난 후 다시금 양전이 이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였다. 황해도(1471) · 강원도(1476) · 영안도(1489) · 경기도 · 충청도(1492) · 제주(1493) · 경상도 · 전라도(1493) 순으로 양전은 실시되었다.
성종대왕 - 경제제도의 완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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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정책으로서 양전사업과 더불어 성종은 농업에 관한 의례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친경(親耕 : 1475) · 친잠의(親蠶儀 : 1477)를 정하고, 의복의 필수 원료로 이용되게 된 목면의 재배를 권장하여 경상도 · 전라도에서 당목면(唐木綿)을 재배하도록 한 것(1474), 최부(崔薄)가 농업 관개용 수차를 제작한 것(1488), 경기 연해에 중국에서 들여온 당도(唐稻)를 재배하도록 한 것, 왕실 농사 시험장으로서의 내농작(內農作)을 후원에 설치하였다가(1488) 후에 폐지(1494)한 것 등은 그 내용이라 하겠다.

 그러나 성종조는 조선초기의 정치경제상황이 변화되는 시점이다. 즉 초기의 다양한 변화상과 이의 수용이라는 측면이 1백여 년이 지나는 시간 속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정태적인 부분이 많이 생겼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과전제라는 고려말 조선초의 전제(田制)는 수조권분급의 공평성과 수취구조의 개선을 통한 농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하였지만 공신층의 형성과 관료층의 확대, 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의 운영 등과 같은 왕실재정의 수용확대라는 전제의 변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수조권을 위주로 하는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가 점차로 소유권 및 경영권을 중심으로 하는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로 변화한 것은 당연스런 결과였다.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 대응하여 제시된 것이 관수관급제라고 할 수 있다.
 
성종조의 경제재정구조의 변화는 이와 같은 점에서 과도기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부의 집중이라는 모순을 내포하면서 점차적으로 통제보다는 자율적인 운영구조를 갖추었고 여기에는 성리학의 심화라는 사상적 변화도 그 요인이 되었으며 학문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 처한 성종의 경제에 대한 구상은 나름대로 그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원칙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지만 큰 흐름은 오히려 사대부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지주층과 부농의 운영이란 측면으로 흐르게 되었다.
성종대왕 - 유교문화의 흥성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유교문화의 흥성

 학문과 사상의 발전은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지식의 수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교육과 독서를 반드시 행하여야만 한다. 즉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발전에 있어서 서적이라는 정보축적물의 간행은 반드시 비례상관관계를 맺기 마련인 것이다. 성종조의 유교 문화가 조선 초기 유교 사상을 집대성하는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경전과 제도, 지리, 법률, 역사 등의 다양한 분야의 서적 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성종조 서적 출판은 조선 5백년의 역사 속에서 빛나는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성종 때 이루어지고 있는 서적 편찬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1471년(성종 2) 12월에 그동안 불경 등의 간행에 있어 큰 역할을 수행한 간경도감을 혁파하였으며, 동왕(同王) 4년 8월에는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새로 만들고 실록을 이안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성종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 자체 내의 불교숭상이 이제는 유교의 정치사회 운영원리를 받아들이면서 더 이상 불경의 편찬이나 언해 작업을 꾀하지 않게 되었으며, 비로소 유교의 정치 이념이 사회지배사상으로서 작용하게 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성종 4년의 전주사고 설치와 1475년(성종 6) 존경각(尊經閣)의 설치는 왕실 및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서적편찬 및 보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종대왕 - 유교문화의 흥성 (2)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양성지는 이렇게 편찬되는 서적의 간행 보관에 관해 12가지 조항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으며, 1490년(성종 21)에는 각 도 관찰사에게 여러 서적을 널리 구해 올리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다. 서적의 편찬에 대한 욕구는 활자의 발달을 가져오게 마련이고 성종은 이에 1484년(성종 15)에 갑진자(甲辰字) 30여만 자, 1493년(성종 24) 동활자인 계축자(癸丑字)를 만들게 된다.
 성종조 편찬되고 있는 서적을 크게 법률 · 역사 · 경전 · 지리 · 의학 · 음악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각각의 분야에 있어서의 업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법률 : <경국대전>(신묘대전) (성종 원년, 10), <경국대전>(갑오대전) <경국대전속록(經國大典續錄)> (성종 5, 1), <경국대전>(을사대전)(성종 16) 반행, <대전속록(大典續錄)>(성종 23, 7)완성

 역사 : <세조실록> 완성(성종 2, 12), 신숙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세종실록> · <문종실록> · <세조실록> · <예종실록> 간행(성종 4, 6), 한명회 <신증강목통감(新增綱目通鑑)>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등을 올림(성종 6, 6), 노사신 · 서거정 등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찬진(성종 7, 12), <국조보감(國朝寶鑑)> 속간(성종 10, 5), <삼국사기(三國史記)> 간행을 명함(성종 13, 10), 서거정 등 <동국통감(東國通鑑)> 찬진(성종 15, 11), 서거정 등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 찬진(성종16, 7)

 경전 : 이석형 등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찬진(성종 3, 4),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완성(성종 5), 양성지 <친사문묘송(親祀文廟頌)> 지음(성종 8, 8), 노사신 · 이극돈 등에게 <강목신증(綱目新增)> 편찬을 명함(성종 13, 7), 홍귀달(洪貴達) 등에게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수하게 함(성종 14, 12), 사서오경 · 제사(諸史) 등을 간행, 각 도 향교에 보냄(성종 20)

 지리 : 김자주(金自周), <삼봉도도(三峰島圖)>를 올림(성종 7, 10), 양성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완성(성종 9), 서거정 등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편찬(성종 12, 4), 양성지 <연변성자도(沿邊城子圖)> · <양계연변방수도(兩界沿邊防戍圖)> · <제주삼읍도(濟州三邑圖)>, 안철손(安哲孫)이 <연변조운도(沿邊漕運圖)>, 어유소(魚有沼)가 <영안도연변도(永安道沿邊圖)>, 이순숙(李淳淑)이 <평안도연변도(平安道沿邊圖)>를 만듦(성종 12), 이봉(李封) <여지도(輿地圖)>를 올림(성종 15, 3), 노사신 등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수교(?校)(성종 16, 4), 김종직 등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수교 완성(성종 17, 12), 김종직 등이 올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간행(성종 18, 2), 한치형(韓致亨) <의주지도(義州地圖)>를 올림

 의학 : 한명회 <신증본초(新增本草)> 올림(성종 6, 6), <의방유취(醫方類聚)> 30부 간행(성종 8, 5),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간행 보급하도록 함(성종 9, 10),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중 자주 쓰이는 약방을 언문으로 번역 간행하게 함(성종 19, 9), 윤호(尹壕) 등 <신찬구급간이방(新撰救急簡易方)> 찬진(성종 20, 5),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을 각 도에 보내 간행 배포(성종 20), 허저(許佇)가 찬진한 <의방요록(醫方要錄)> 간행(성종 24, 20)
성종대왕 - 유교문화의 흥성 (3)
제 9대조   이름(한글):성종대왕   이름(한자):成宗大王

음악 : <신찬등가악장(新撰登歌樂章)> 만듦(성종 23, 8), 성현(成俔) · 류자광(柳子光) 등 <악학궤범(樂學軌範)> 완성(성종 24, 8)

 문집 :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 간행(성종 5), 노사신 · 서거정 등에게 역대 문신들의 시문을 찬집하도록 함(성종 7, 12), 서거정 <동문선(東文選)> 편찬(성종 9, 3),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 간행(성종 13), <왕형공시집(王荊公詩集)> 간행(성종 16), <문한유선(文翰類選)> 간행, 문신들에게 나눠줌(성종 17, 12)

 기타 :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의 내훈(內訓) 간행(성종 6), <훈세평화(訓世評話)>를 대본으로 하여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를 산개(刪改)하도록 함(성종 11, 10), 사족(士族) 부녀를 위해 <언문삼강행실(諺文三綱行實)> <열녀도(烈女圖)>를 간행하도록 함(성종 12 3), <진서(陣書)> 1,000부를 간행하여 무신들에게 나누어 줌(성종 15, 6), 홍문관에 <내반원명감(內班阮明鑑)> 편찬을 명함(성종 15, 11), 손순효(孫舜孝) <식료찬요(食僚撰要)> 찬진(성종 18, 4), 교서관에 <사문류취(事文類聚)> 간행을 명함(성종 24, 9).

 이외에도 성종은 역대(歷代)의 제왕(帝王)과 후비(后妃)의 선악으로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채택하여 정리해 세 편(編)을 만들었는데, 이를 <제왕명감(帝王明鑑)> · <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성종조에는 방대한 양의 서적이 편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률의 집대성과 연구의 결과로 나온 <경국대전>, 역대 시문을 집대성한 <동문선>, 지리 · 산물 · 풍속 등을 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東國通鑑)>, 향약 및 처방 등을 정리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길가군빈흉(吉嘉軍賓凶)의 오례(五禮)로서 왕조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음악에 대한 악보 악장 등을 집대성한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은 당시의 유교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정리가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서적의 편찬은 이를 이해하고 정리하며, 집대성할 수 있는 인적 자원과 학문적 수준, 호학(好學)의 기질을 가진 성종의 지극한 관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밖에도 성종은 민의 보건과 의료 구제를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는데, 대체로는 세종조나 세조조의 것과 내용을 같이하는 것이었지만 한층 더 구체화하거나 집대성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의서와 의약을 집대성하였을뿐만 아니라 향약(鄕藥) 등에 대하여도 집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 ·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의 서적 편찬이 그것이다. 또한 실전 및 긴급한 구조 상황에 곧바로 응용할 수 있으며, 이용하기도 쉬운 내용을 담고 있는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을 냄으로써 조금의 응급 처치를 받아도 살 수 있는 혹은 상처가 심해지거나 덧나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의학 서적의 발간과 더불어 성종은 의녀권과조건(醫女勸課條件)(성종 9)을 정하여 의원들이 직접 접촉할 수 없는 아녀자들에 대한 치료와 의학 지식을 가르침으로써 내의원(內醫院)과 혜민서(惠民署)에서 의료와 관련된 심부름 즉 말하자면 요즈음의 간호원과 같은 일에 종사하도록 하였고, 향약에 대한 정확한 고증을 통해 그 이용을 실용적으로 적은 향약흥용조건(鄕藥興用條件)(성종 9)도 정하기에 이르렀다. 성종 스스로 의학에 대한 지식을 습독하기 위해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을 두고 그 권려절목을 제정(1489)한 것은 제왕(帝王)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